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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대단한 대한민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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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40년 전 나는 숭의초등학교 빙상부 소속이었다. 밴쿠버 겨울올림픽 남녀 빙속 500m의 동반 금메달리스트인 모태범과 이상화의 모교인 은석초교와 더불어 리라·숭의는 당시 ‘빙상 빅3’라 불리던 학교들이었다. 나 역시 겨울철에는 아예 태릉아이스링크에서 살다시피 했고 한여름에도 지금은 없어진 동대문 실내아이스링크에서 대기순번을 기다려 혹독하리만큼 빙상훈련을 받았다. 덕분에 지금도 나는 남들의 1.5배는 족히 넘는 허벅지를 유지하고 있다.

# 당시 팀 동료 중에는 훗날 국가대표가 된 임현숙이 있었다. 그녀는 수줍음이 많았지만 체력 면에선 남자 이상이었다. 학교 근처의 남산으로 오르는 긴 계단길을 수십 번 왕복해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무지막지한 훈련 속에서도 그녀는 끄떡없을 만큼 강철체력이었다. 그런 그녀는 숭의초·중을 거쳐 숭의여고 2학년 때 이미 전국남녀종별빙상선수권대회 겸 겨울올림픽파견 최종선발대회에서 500m와 1000m를 석권했다. 덕분에 1980년 2월 미국 레이크 플래시드에서 열렸던 제13회 겨울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부문에 최연소로 출전 자격을 얻었지만 당시 빙상연맹의 석연찮은 개입으로 결국 올림픽행이 좌절되고 말았다.

# 하지만 그 후에도 그녀는 81년 전국남녀종합빙상선수권대회 여자부 종합우승, 82년 전국남녀대학빙상경기대회 500m와 1000m 2관왕, 83년 같은 대회 1000m 우승, 84년 같은 대회 500m 우승 등 국내 최강의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84년 말 그녀는 쇼트트랙 선수로 전환해 제1회 전국쇼트트랙빙상대회에서 500, 1000, 1500, 3000m를 모두 석권하며 4관왕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

# 그녀는 독했다. 선수 시절 맹장염에 걸린 상태에서도 시합을 포기하지 않고 달렸을 만큼 악바리였다. 결국 그녀는 결승점을 지난 후 그대로 빙판 위에 쓰러져 급히 병원으로 실려가야 했다. 그런 악바리 근성이 그녀를 국내 최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국내에선 펄펄 날던 그녀도 나라 밖으로 나가면 맥을 못 췄다. 85년 2월 그녀는 이탈리아 벨루노에서 열린 겨울유니버시아드에 출전했지만 메달은 없었다. 그나마 86년 3월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제1회 겨울아시안게임에 출전해 여자 500m에서 동메달을 따는 데 만족해야 했다.

# 당시 우리는 제 아무리 펄펄 날아도 나라 울타리 안에 갇힌 전국체전 수준이었고 역대 최강이라는 세평을 들어도 아시안게임의 메달을 넘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세계무대, 즉 올림픽은 정말이지 꿈도 꾸지 못했다. 만약 올림픽에서, 그것도 빙속에서 금메달을 딸 가능성이 우리들 중 누군가에게라도 있었다면 나는 빙상을 그만두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올림픽 남녀 빙속 500m를 석권한 모태범과 이상화의 질주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린 시절 힘겨웠던 훈련의 기억, 꿈마저 가두어야 했던 그 시절의 어쩔 도리 없던 한계를 뛰어넘어 아버지 세대가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을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해냈기 때문이리라.

# 대한민국은 정말이지 대단한 나라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 살면서 대한민국의 일대기를 다시 쓰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역시 대단한 국민이다. 이런 나라, 이런 국민이 또 있을까 싶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100년 전 나라를 잃고 국치에 몸서리치던 그 나라가 아니다. 60년 전 전쟁의 참화 속에 울고만 있는 그 나라도 아니다. 잘살아 보자며 악바리 근성 하나 갖고 버텨내던 그 나라 역시 아니다. 우리는 세상을 놀라게 하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놀라게 하며, 꿈의 한계마저 넘어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가고 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이 감격시대의 살아 있는 증인들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황홀하고 행복하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