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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6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64. 한타박스 공청회

기대치 이하로 항체 생성률이 떨어졌다는 미육군전염병연구소의 의뢰결과는 혈청을 연구자가 인위적으로 비활성화시킨 탓으로 드러났다.

실제 환자의 혈액과 마찬가지 조건으로 비활성화시키지 않은 혈청으로 재조사했더니 만족스런 결과를 얻었고 담당자인 코니 스몰존박사는 내게 사과편지까지 보내왔다.

한타박스가 물백신이란 모교수의 연구결과도 지금 생각해보니 방법상에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접종 사실을 연구자가 구두로 물어서 확인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백신이 까다로운 보관이나 유통.접종방식 등 조건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접종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 백신을 제대로 접종했는지 먼저 따져봤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한타박스의 효능을 가리기 위한 공청회까지 열리게 됐다. 2000년 3월 국립보건원 공청회장엔 각계 전문가 60여명이 참석했다.

좌장은 국제백신연구소의 이정길박사였다. 공청회의 결론은 한타박스의 효능이 인정되며 앞으로도 군인과 농부, 유행지역 주민, 실험동물을 다루는 연구원에겐 지속적으로 접종을 해야하는 것으로 내려졌다.

한타박스의 효능을 인정하는 논문이 70여편인 반면 효과가 없다는 논문은 1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2000년 12월 필자 내외는 학술원회장의 자격으로 왕립스웨덴학술원과 노벨재단의 초청으로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했다.

스톡홀름 콘서트홀 대강당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학생들의 발랄함이었다.

호텔직원이나 의전요원이 아니라 스웨덴 전역에서 선발된 대학생들이 세계 각국에서 초청된 유명인사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안내와 동시에 수상연설을 듣는 그들의 진지함은 필자가 보기에도 흐뭇한 모습이었다. 스웨덴은 노벨상 시상식을 2세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가지 놀라운 것은 일본의 준비였다. 스톡홀름 일본대사관엔 10년전부터 노벨상 과가 따로 설치되어 전담 사무관 2명이 노벨상 수상의 최신 동향을 비롯한 정보를 수집한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김대통령이 평화상을 수상해 노벨상 수상국가의 반열에 섰지만 의학.물리.화학 등 과학분야에서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음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노벨상과 관련해 한가지 오해부터 풀었으면 싶다. 그것은 외국 국적의 한국인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것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다.

지금도 언론에선 미국 등 해외 학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한국인 과학자들을 노벨상 후보로 집중 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노벨상 수상은 다소 빛바랜 감이 있다. 면역기전을 밝혀 87년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미국 MIT대 토네가와 교수는 비록 일본인이지만 학문적 토대는 모두 미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토네가와 교수의 수상 공로는 일본이 아닌 미국의 것이란 의미다. 76년 노벨상 수상자로 필자와 절친한 사이인 미국립보건원 가이듀섹 박사도 폴란드 출신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슬로우바이러스 규명 업적을 폴란드의 것으로 돌리지 않는다.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가 진정 의미를 지니기 위해선 외국이 아닌 한국 과학계가 배출한 사람이 아니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네이처.사이언스 등 저명한 해외학술지에 한국인의 이름이 곧잘 거명된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미국인 지도교수 아래 연구 실무를 맡았던 제1저자일 뿐 연구의 기획과 책임을 지는 최종저자(last author)는 아니다.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려면 최종저자에 당당히 한국인 과학자의 이름이 등장해야할 것이다.

이호왕<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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