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추풍령 大雪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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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너무 황당합니다. 그러나 결코 이 눈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7일 추풍령 고속버스 안에 오도 가도 못하고 갇혀버린 한 승객의 말이다. 그날 오전 11시에 부산을 출발한 버스는 다음날 오전 4시가 넘어서야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추풍령에는 1935년 적설량 관측 이후 최대인 32.8㎝가 쌓였다.

꽉 막혀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움직이지 못하는 고속도로에서 내려 눈을 밟으니 거의 무릎까지 빠진다.

길이 막히자 철도 등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려 고속도로 위에서 내린 승객들도 있었다. 안내린 승객들도 인내의 한계에 달한 듯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히 가라앉으며 온통 하얀 눈세계로 빠져들었다.

'눈 와야 솔이 푸른 줄 안다' 는 우리 속담이 있듯 흰 눈을 이고 있는 '세한도(歲寒圖)' 의 세계로, 아니 자신의 마음 중심 청정한 세계로 빠져들며 표정들도 한결 밝아지고 옆사람들과 이런저런 눈 이야기도 나누기 시작했다.

눈에 갇힌 전국의 도로에서 눈이 주는 이런 포근함을 정말 오랜만에 가져본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은하수를 거꾸로 쏟는가 했더니/어느새 산봉우리가 눌리어 꺾일까 겁이 나네. /눈 털고 들어서자 주막 주인/십년 묵은 술항아리 딱지를 떼고/따스한 인정에 고향이 같이 들어앉네. " 고려 말 문신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내리는 큰 눈 속에서 이렇게 사람 사이의 정과 고향을 보았다.

주막 대신 들어선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몰리는 손님들로 하여 십년 묵은 술은 커녕 국수 한그릇 사먹기 위해 늘어선 줄 뿐이다.

그럼에도 버스로 돌아오는 승객들의 손에는 음식물들이 들려 있고 서로서로 권했다. 나누는 따뜻한 이야기들로 인해 버스 안은 이제현 시 속의 주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온 산야를 하얗게 뒤덮듯 눈은 사람 사이의 거리도 지운다. 그래 하얗게 외로운 마음들이 따뜻한 정을 서로 나누게 한다.

눈이 내려 더러운 것들을 하얗게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눈을 바라보며 우리가 되찾은 순수한 마음과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와 정이 세상의 더러움과 삭막함을 덮는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정치 지도자들의 이전투구가 우리들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더니 대설이 내려 환한 위안을 준다.

정말 이 눈 속에 서로 상처를 못줘 안달난 듯한 그들의 싸움을 묻어버렸으면 좋겠다. 부디 눈을 들어 흰 눈 이고 있는 북한산 한번 바라보길 바란다.

이경철 문화부장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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