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 '태조왕건' 에 왕건은 들러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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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나는 미륵이니라!“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소박한 미륵 정신으로 등장했던 궁예는 집권 후반기로 접어들며 타락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독화살을 맞은 뒤 애꾸눈 궁예가 제정신이 아니다.

전체 1백56부작 중 82부를 방영한 KBS1 '태조 왕건' (토.일 밤 9시45분)은 다음달 중순 타락한 궁예의 죽음과 함께 전반부를 끝낸다.

그러나 드라마가 '터닝 포인트' 를 맞는데도 왕건의 시대는 아직 멀다. 후반부도 왕건이 아니라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에게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 최고 시청률 44.5%를 올리며 안방극장의 패권을 장악한 '태조 왕건' 은 그후로 몰락해가는 궁예의 주변을 디테일하게 그리며 시청자를 붙잡고 있다.

특히 개국의 일등 공신인 종간이 새로 등장한 참모 아지태와 갈등을 빚으면서 궁예의 용인술(用人術)에 금이 가는 모습은 '인사가 만사' 라는 현대 정치의 제1명제와도 묘하게 맞닿아 있다.

이처럼 권력(궁예)과 권력 주변의 2인자들(종간과 아지태)이 엮어가는 이야기 속에 덕장 왕건은 주변부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궁예역을 맡은 김영철은 지난해 KBS 연기대상을 받았을 정도로 궁예의 카리스마를 잘 표현했다.

전반부의 마지막을 장식할 궁예의 죽음은 '저자거리에서 백성의 돌에 맞아 죽는다' 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와 달리 철원성 앞 산성에서 왕건에게 맞서 최후까지 항쟁하다 죽는 것으로 그려진다.

제작진은 "궁예가 죽음을 맞는 부분까지 드라마의 실제 주인공이 궁예였다면 후반부는 왕건의 라이벌인 견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 이라며 "드라마의 최종 부분을 제외하면 왕건은 들러리 형식을 취하게 된다" 고 밝혔다.

그렇다면 '태조왕건' 이라는 제목과 달리 왕건이 들러리만 서는 이유가 궁금하다.

안영동 책임 프로듀서는 "드라마는 결국 등장 인물들간의 갈등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수밖에 없는데 화합정치와 덕치를 표방한 왕건을 전면에 내세워서는 극에 재미를 불어넣을 수 없기 때문" 이라고 설명했다.

왕건이 빛을 발하는 것은 드라마 말미에 견훤이 왕건에게 투항하고 자신의 아들이 일으킨 반란을 스스로 제압하면서부터.

결국 시청자들은 궁예와 견훤.왕건을 비교하는 감상법을 통해, 다시말해 드라마가 다 끝난 뒤에야 "아, 이래서 태조 왕건이 주인공이구나!" 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왕건은 백성이 따랐고 신라가 스스로 나라를 바치는 최종 승자로 자리잡게 된다.

안PD는 "드라마 초기에 최수종을 왕건 역에 캐스팅한 데 불만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제작진은 처음부터 왕건의 캐릭터를 궁예.견훤과는 다르게 설정했다" 며 "왕건은 순간을 참지 못해 무엇이든 부숴버리는 강한 캐릭터가 아니다" 고 설명했다.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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