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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계 2001년 전망과 50년 회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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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바둑에서 실리와 두터움은 상생상극한다.

바둑 두기란 궁극적으로 '그 두가지의 조화(調和)를 추구하는 것' 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바둑계라는 밀림의 세계 또한 이 두가지 조건이 지닌 상극(相剋)의 힘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오곤 했다.

실리가 득세하면 두터움이 그를 밀어내고 두터움이 득세하면 실리가 다시 그를 밀어내는 현상이 반복돼 왔다는 얘기다.

바둑계 50년을 돌아보면 해방 이후 실리의 명수라 할 조남철9단 1인시대가 이어지다가 1965년 두터움의 화신 같은 김인9단이 조9단에게 국수를 따내고 왕위를 추가하면서 김인시대를 열었다.

72년 서봉수9단의 파격적인 등장과 더불어 바둑계는 춘추전국시대로 넘어간다.

일본유학파인 윤기현9단.하찬석8단.조훈현9단이 차례로 돌아와 타이틀을 따내고 정창현7단.김희중9단이 가세해 '으며 김인9단.조남철9단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어 '절대강자가 따로 없는 군웅할거시대가 펼쳐졌던 것이다.

이걸 통일한 인물이 조훈현9단이다. 그는 모든 타이틀을 휩쓸며 바둑계의 1인자 자리에 올랐다.

그의 유일한 적수는 서봉수 한사람뿐이었기에 이 시대를 '조.서(曺.徐)시대' 라고도 부른다.

기풍을 본다면 조.서'(曺徐)'는 본질적으로 실리바둑이었다.

조9단이 실리라는 밑바탕에 발군의 스피드와 전투를 가미했다면 서봉수는 조훈현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견실' 을 가미했을 뿐이다. 김인의 두터움 다음 실리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15년 조.서시대' 의 일각을 제일 먼저 허문 인물은 유창혁9단이다.

88년 22세의 유창혁은 두터움을 바탕으로 한 화려한 공격바둑으로 조훈현의 타이틀을 탈취해 새 얼굴을 갈망하던 팬들의 박수를 받는다.

그리고 90년 15세의 이창호가 무수한 신기록과 함께 조훈현으로부터 타이틀을 연속 쟁취하며 최우수기사에 올랐다.

이창호시대, 혹은 4인방시대라 불리는 10년이 시작된 것이다.

이 시기에 실리의 대가 조훈현.서봉수를 두터움의 새 경지를 연 이창호.유창혁이 따라잡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자의 자리에 오른 이창호는 두터움을 추구하면서도 실리에서도 뒤지지 않는 불가능에 도전했다.

상극을 하나로 묶으려는 그의 시도가 아직 계속되고 있을 때 2000년 바둑계는 이세돌3단이란 새 인물을 만들어냈다.

그의 기풍은 실리 계열로 드러나고 있다. 실리적이며 강렬한 전투바둑을 구사하는 이세돌은 과연 두터움의 최후 경지를 추구하고 있는 이창호를 격파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것이 2001년의 화두가 될 것 같다.

2001년의 바둑계는 세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첫째 이창호의 정상 재확인이다.

둘째는 이창호와 이세돌이 각축하는 시나리오다.

세번째는 이창호.조훈현.유창혁.서봉수.이세돌.루이나이웨이(芮乃偉).최명훈 등 타이틀 보유자들에다 신예기사군까지 가세해 대혼전을 벌이는 것이다.

바둑계 50년을 1인자로만 잇는다면 '조남철-김인-조훈현 - 이창호' 가 되고 이것을 기풍으로 바꾸면 '실리-두터움 - 실리 - 두터움' 이 된다.

그러므로 흐름에 따라 두터움의 다음은 '실리' 일 가능성이 크고 이세돌의 득세는 이점에서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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