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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의 소리] "하고 싶은 걸 왜 참나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마누라만 빼고 다 바꾸자" 던 구호는 오래 전에 무색해지고 말았다. 개발독재 후유증으로 무기력하게 처져 있는 거대한 공화국. 그 공화국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제도권 학교. 그 속에서 아이들은 서서히 회색인간이 돼가고 있다.

"딴짓 하면 손해본다" "대학갈 때까지만 참아라" "욕망을 억제하고 감수성을 죽여라" . 일류대학에 간 아이들은 이런 원리를 누구보다도 잘 내면화한 아이들이다.

이들은 보호색으로 자신을 감추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다가 그만 암울한 회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여기에 선명한 빛깔을 가진 아이들이 있다. "아무 것도 안 하자!" 라는 아우성이 일고 있는 이 사회에 난데없이 "하자!" 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하고 싶은 사람끼리 하자" "하고 싶을 때 하자" . 영등포 한 구석에 둥지를 틀고 있는 이 청소년직업체험센터인 '하자 센터' 는 이제 겨우 일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시아에서도 많은 이들이 방문하고 감탄을 한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보고 가는 것은 무엇일까. 하자 센터의 한 구석에서는 네명의 아이들이 '코코 봉고' 라는 스낵 바를 차려서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장부를 정리하고 결산을 맞추어가면서 삶을 배운다.

107호에서는 열심히 책을 읽으며 시대의 언어를 만들어 가는 인문학부 교실이 있고, 105호 온라인 명함회사 아이들은 자기가 디자인한 명함을 갖고 평소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

3층 대중음악 작업장은 세계의 청소년 인터넷 방송을 벤치마킹하면서 왜 자기 프로가 인기가 없는지를 조사하는 10대 디제이와 엔지니어들, 일주년 행사를 위해 노래를 짓거나 시디를 굽거나 그 작업과정을 영상화해 웹에 띄우는 아이들로 복작댄다.

아직 하고 싶은 것을 찾지 못한 아이들은 난간이나 쉬자방에서 마냥 쉬기만 한다. 쉬다가 몸이 근질거리면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하자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흐른다. 그런데 보면 어느새 놀라운 것들이 생산돼 있다.

이들은 대학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더 이상 미래를 보장해주는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아이들은 "학교를 이탈하면 죽는다" 는 어른들의 강박증이 안타까울 뿐이다. 배움의 기쁨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면, 욕망이 없는 기계인간이 돼야 한다면 어떻게 이 카오스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학교화' 의 결과로 얻게될 무기력증이다.

이들이 학교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자신들이 원하는 학교를 하자 센터에서 만들어가기도 하고, 또 제도권 학교를 다시 가기도 한다.

학교가 유치해 더 이상 다닐 수가 없다던 중학교 중퇴생 정아는 일년을 잘 쉰 뒤 올해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입시교육이 자신의 감수성을 죽일 뿐이라던 민희는 일류대학에 특차로 가볍게 들어갔다.

적극적 학습의 방식을 터득한 이들에게 학교는 '버티는 곳' 이 아니라 '관찰과 적극적 개입' 의 공간이 될 것이다.

대량생산체제의 규율에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아이들이 이제 새 공간을 마련해가고 있다. 제각각 따로 가는 것 같은데 어느 새 인천의 친구들, 일본의 친구들과 손을 잡는 아이들. '원탁 토론의 정치' 에 익숙해진 이 자율의 아이들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를 착실하게 실현해가고 있다.

1. 하고 싶은 일하면서 해야 하는 일도 할 거다 2. 나이 차별.성차별.학력차별.지역차별 안한다 3. 어떤 종류의 폭력도 행사하지 않을 거다 4. 내뒤치다꺼리는 내가 할 거다! 5. 정보때문에 치사해지지 않을 거다. 정보와 자원은 공유한다 6. 입장 바꿔 생각할 거다 7. 약속은 지킬 거다/못지킬 약속은 안할 거다. 이 일곱가지 약속을 지키면서 말이다.

전환기에는 '먼저 된 자' 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가 먼저 된다. 나비의 작은 팔락거림이 태풍을 일으킨다는 '나비효과' 의 비밀을 나는 알고 있다.

조한 혜정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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