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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칼럼] 새해 선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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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K형. 또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예년 같으면 서가의 먼지를 털며 멀리 잊혀진 추억의 조각들을 더듬었을 터입니다.

내 홀로 밤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女人의 옷벗는 소리.

성현 말씀대로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천명은커녕 사회의 물리조차 깨치지 못하고 허둥대는 제 모습이 여간 부끄럽지 않습니다.

*** 정말 두려운 건 체념

종강이 가까운 한국경제론 강의 시간에 저는 학생들 앞에서 이런 '연극' 을 했습니다. "올해부터 학사 관리가 아주 엄격해져서 수강생 절반을 '의무적으로' 실격시키게 되었습니다. " 이렇게 운을 떼자 교실이 일순에 툰드라의 혹한으로 뒤덮였습니다.

그렇다고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한테 무조건 F학점을 줄 수도 없으니 "학점에 여유가 있어서 이 강의 하나쯤 실패해도 별 문제가 없거나, 가정 형편이 괜찮아 한 학기쯤 더 등록해도 큰 지장이 없는 학생들이 자청해서 나서면" 아주 고맙겠다고 시치미를 떼었습니다.

그리고는 학생 한명을 교탁으로 불러 '낙제 자원' 신청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 마당에 누가 무슨 수로 입을 열겠습니까? 이렇게 자청하는 사람이 없다면 대표가 아무나 지명하라고 짐짓 '순교자 사냥' 을 강요했습니다.

그는 얼굴이 백지로 변했고, 그의 눈길을 피하려는 학생들은 막다른 협곡에서 포수를 만난 어린 노루의 표정이었습니다.

불과 5분 가량의 촌극이었으나 학생들한테는 그 엄청난 좌절감이 5년의 무게로 짓눌렀을 것입니다.

"자, 한국경제가 당면한 구조조정과 근로자 해고의 한 단면이 이와 같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며 연극을 파한 뒤에도, 죽음의 늪 같은 교실의 정적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바탕 학생들을 골탕먹였지만, 왠지 자책의 감정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저 차고 쓸쓸한 거리로 내몰릴 근로자들의 처지는 명색이 교수라는 자가 한가하게 벌일 서푼짜리 코미디 소재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시 어느 학생이 정색을 하고 "교수님은 그 대책이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되물었다면 제 등골이 서늘했을 것입니다.

제가 배운 경제학이 잘못이든 제가 경제학을 잘못 배운 것이든, 경제학이 이렇듯 무력한 도구인지를 요즘 새삼스레 절감하고 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있어도 실직은 극심한 고통인데, 하물며 생계조차 막연한 실직자의 좌절과 분노는 진정 어떻겠습니까? 지면과 화면을 누비는 파업 보도에 짜증을 내면서도 그것이 바로 그들의 삶을 위한 몸부림이고 '생명 실습' 이란 사실을 과연 우리는 얼마나 절실하게 깨닫고 있을까요?

그러나 구조조정은 우리 경제의 '긴급 명령' 입니다. 실직자의 고통 앞에 어떤 위로도 사치스러우나, 그 고통 때문에 구조조정을 늦출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지난 정권도 1997년 8월 금융개혁 법안을 상정했으나, 당시 대선 주자들의 외면으로 국회 통과가 무산된 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들어갔다고 지금도 원망과 유감이 대단합니다.

그렇게 지각한 결과 은행의 해외 매각, 통폐합, 해고 등등 벌은 벌대로 받았으면서도 오늘의 사정은 3년 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되었지요. 적당한 핑계로 현재의 고통을 피하더라도, 3년 뒤의 복수는 한층 더 혹독할 것입니다.

*** 심기일전의 정치 고대

물론 좀더 나은 '방법' 이 없었는지는 묻고 싶습니다. 일례로 기업 매각이나 공적자금 지원에는 노조의 감원 동의서가 필수적이라는 가혹한 주문 앞에 과연 누가 누구를 지목하여 순교를 강요하겠습니까?

이럴 바에야 정부가 주도하는 현재의 인수합병(M&A)보다 차라리 시장 퇴출 뒤의 자산부채인수(P&A) 방식이 더 수월한 대안이 아니었냐는 생각도 듭니다.

같은 F학점이라도 그것이 일방적 지시 때문이라면 크게 반발하겠지만, 그런 강제가 없다면 학생들도 시험을 잘못 치른 결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허울 좋은 구조조정에 드는 1백50조원을 예금자 보호와 실업대책 비용으로 돌렸던들 오히려 효과적이었을지 모릅니다.

K형. 경제는 좋다가 나빠지기도 하고, 나쁘다가 다시 좋아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정말 두려운 것은 다시 좋아질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회의 체념입니다.

여기 희망을 불어넣는 것이 정치의 소임이라면, 심기일전(心機一轉)의 정치야말로 새해의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다망한 연말 편안히 보내십시오.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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