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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5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57. 출혈열 옮긴 고양이

나는 대장내시경을 받기로 마음 먹었다. 대장내시경이란 항문을 통해 대장 속으로 내시경을 삽입해 의사의 눈으로 직접 살펴보는 검사다.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통증도 있어 쉽게 받긴 어렵다. 대개 항문에서 가까운 직장(直腸)만 살펴보는데 필자는 내시경 끝이 30~40㎝ 들어가 대장 전부를 이 잡듯 뒤지는 검사를 받았다.

당시 필자의 대장내시경 검사는 지금 고려대병원 의료원장으로 있는 현진해박사가 맡았다. 현박사는 국내에서 가장 내시경을 많이 시술한 내시경 전문가다.

한참 내시경을 들여다보던 현박사는 "선생님, 드디어 원인을 찾았습니다. 이게 말썽을 부렸군요" 라며 소리쳤다. 필자도 내시경기계에 달린 화면을 통해 문제의 장면을 보았다. 맹장(盲腸)이었다.

맹장은 의학용어로 충수돌기다. 이곳이 발갛게 부어있는 것이 아닌가. 영락없는 맹장염이었다. 10년동안 나를 괴롭혀왔던 질환이 고작 맹장염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은 일반외과의 베테랑 황정웅교수가 맡았다. 불과 10분만에 수술은 끝났다.

황교수는 내게 "수십년째 외과교수를 해왔지만 이렇게 작게 쪼그라든 맹장은 처음 본다" 는 말과 함께 잘라낸 맹장을 보여줬다.

새끼손가락 크기도 안돼 보였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렸던 탓에 필자의 맹장은 10년간 혼자서 꿍꿍 앓아온 것이었다. 처음 아팠을 때 민병철교수의 말대로 바로 수술에 들어갔더라면 깨끗하게 해결될 것을 10년이나 헛고생을 한 셈이다.

맹장염 수술 후 지금까지 나를 괴롭혀온 복통은 씻은듯이 사라졌다. 필자가 개업중인 동료들과 만나 이런 이야길 꺼내면 그것이 바로 VIP증후군이라고 꼬집는다.

평범한 환자였으면 쉽게 해결될 것을 VIP라고 의사들이 이것저것 견주다 보면 이런 불상사를 낳는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그 정도였으니 정계나 재계의 거물 등 진짜 VIP가 아플땐 오죽하랴 싶었다. 게다가 맹장염은 가장 진단이 어려운 질환이라지 않은가. 오진율도 제일 높다고 한다.

실제 의료소송이 많은 미국에선 외과의사가 맹장이라고 진단해 수술장에 들어가 배를 열었는데 맹장이 아닌 경우 잘라낸 맹장조직을 바닥에 문질러 일부러 염증을 일으킨다고 하지 않은가.

열이 나고 오른쪽 하복부가 아픈 복통이라야 맹장염인 것은 아니다. 필자처럼 열이 없고 배가 구석구석 아픈 복통도 맹장염일 수 있으니 비슷한 증상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참고하기 바란다.

쥐에 이어 이번엔 고양이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애완용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양이를 잘못 키우면 뜻밖의 낭패를 볼 수 있다. 일본 니카다시에서 유행성출혈열에 걸린 16세 남학생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집에 가봤더니 쥐가 많은 곳은 아니었다. 어디서 유행성출혈열에 걸렸을까 갸우뚱했던 필자는 그 환자가 고양이를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애완용 고양이를 두 마리나 기르고 있었는데 고양이를 곁에 두고 잠을 자는 것은 물론 뽀뽀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서만 기르는 고양이가 아니라 며칠씩 바깥에 나갔다 집안으로 들어오곤 했던 꽤 자유분방한 고양이였다.

고양이의 혈액을 뽑아 검사해보니 양성반응을 보였다. 고양이가 집 밖에서 쥐를 잡아먹고 들어와 환자에게 옮긴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고양이를 통해 사람에게 유행성출혈열이 감염된 세계최초의 사례였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부디 집 밖으로 내보내지 말길 바란다.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기전 한참 약을 올리다 죽이는 묘한 습관이 있다. 발로 쥐를 툭툭 때리며 놀다 쥐가 기진맥진해지면 잡아먹는다.

용을 쓰다 죽은 쥐의 배설물에서 바이러스가 고양이에게 옮겨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겠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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