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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영화 질주] '순애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도대체 ‘순애보’(이재용 감독)의 본질은 무엇인가? 일상에 매몰돼 인터넷 포르노사이트에 혼을 묻는 무기력한 한국 남자들에 대한 진심 어린 연민인가. 한국과 일본을 넘나드는 피천득씨의 수필 ‘인연’같이 맑고 투명한 연애담인가.

관음증의 대상이 된 사람조차 보는 사람과 똑같이 무기력감과 단절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고백한 것인가.

사실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에 북한 사람은 없다.일종의 환상의 거울인 스크린에 투영된,우리 심리 속의 북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자살 충동을 느끼며 인터넷 걸을 한다는 ‘순애보’ 속의 일본 아가씨 아야(다치바나 미사토)는 어떤가.

아야 역시 소위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일본 여자의 정형화된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성(性)을 팔기도 하고,상대적으로 외국 남자에게 더 개방적이라는 일본 10대에 관한 언더그라운드적 전설 말이다.

민족감정에다 여성이라는 이중의 편견이 겹쳐 ‘순애보’는 한국 남자 우인(이정재)에 대한 생생한 디테일에 비해 일본의 아야쪽 얘기를 형편없이 일그러뜨린다.

일본과 한국 사이의 벽을 고려할 때,사실 일본 여성이 주인공이었던 옛날 영화 ‘애란’부터 ‘순애보’까지 한국 영화에 일본여성이 정확히 그려지기란 시기상조인지도 모르겠다.

우인과 아야의 삶이 건조하고 무감각할수록 이들을 일깨우는 사랑,그리고 만남의 숙명성은 더 진하게 다가올 수도 있었다.그러나 ‘순애보’의 연출은 결정적으로 일본과 한국의 상황을 번갈아가다 알래스카에서 모든 접점을 녹이려든다.그러기엔 알래스카는 너무 춥다.

관객에게 감정선의 생생한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순애보’는 오히려 이감독의 전작 ‘정사’보다 한 발 뒤로 물러선 감이 없지 않다.아니면 처음부터 멜로라는 당의정을 의도적으로 배제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스치는 우연과 숙명적 인연이 밝혀지는 마지막은 ‘첨밀밀’을 연상케하고, 정면 샷으로 잡은 자전거를 타는 아야의 속도감은 ‘8월의 크리스마스’비슷하며,인터넷에 빠진 주인공이 감독 자신의 단편 ‘호모 비디오쿠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상한 영화 ‘순애보’.

우인의 이름이 우연과 인연의 약자이고, 우연과 인연을 기다리는 우인의 삶에서 삶의 통증같은 아야를 만나는 것이 인생의 기적이라면, 정형화된 타입에 기대기보다 자신이 아는 캐릭터를 이야기하는 것이 영화의 순리이다.

아마 단절과 무기력감만이 유일한 집단적 열정인 이 세상에서 ‘순애보’는 곱디고운 사랑이야기에만 안주할 수 없었을 테고 감독 역시 기획영화인 ‘정사’의 성공에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순애보’의 교훈은 ‘디테일만으로 영화를 살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감독의 목소리와 상업성을 조화시킨 영화를 만들기란 역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지난한 일이라는 것을 재차 입증시켜 준 아쉬운 작품이기도 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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