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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집 <4> 이충기 작 - 성남시 사송동 ‘동다(東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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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건축가 이충기 교수가 설계한 집 ‘동다’. 이 집에는 산을 마주하는 열린 마당과 벽으로 둘러싸인 닫힌 마당이 있다. 열린 마당에 놓인 데크는 한옥의 대청마루를 연상케 한다. [김경빈 기자]

누구나 변신을 꿈꾼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길 희망한다. 또 자기만의 집을 하나 갖기를 원한다. 경기도 성남시 사송동에 사는 하일남씨(60·다원운영)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이룬 보기 드문 경우다.

그는 무엇보다 나이 마흔에 직업을 바꿨다. 공대를 나와 전기기술자로 살아오다가 차(茶) 사업가로 변신했다. “땅과 더 가까운 일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차 사업은 그렇게 뛰어든 분야였다. 그리고 직접 차 농사를 지었다. 또 인사동에 다원을 차리고, 15년째 차와 다기를 팔고 있다. 그는 사업 기반을 다지고 쉰이 넘어 ‘내 집’을 짓기로 했다. 7년 전 서울 역삼동을 떠나 성남으로 이사온 이유다.

그가 마음에 그린 집은 꾸밈이 없는 집이었다. 식구들, 혹은 지인들이 찾아오면 함께 차를 마실 수 있는 방을 갖추고 노모와 아들과 딸, 다섯 가족이 화목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태어난 집이 ‘동다’. 132㎡규모(1·2층 면적)로 제법 규모가 큰 데도 찾은 사람을 전혀 위협하지 않는다. 시쳇말로 ‘기름기를 쫙 뺀 듯’ 장식을 거부하고 필요한 것만 적당히 갖춘 집의 구조와 살림살이 때문이다.

다실 창으로 내다본 닫힌 마당. 최근 눈이 내린 날 ‘동다’의 집주인이 직접 찍었다. (사진 위)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하씨. 부부는 서울로 통근하는 게 번거롭지만 “사시사철 풍광이 좋은 이 집을 떠나지 못한다”고 했다. [김경빈 기자]

◆열림과 닫힘=그의 집엔 소나무 한 그루 있는 중정(中庭)과 야외의 마루데크 외에는 마당이라 내세울 것도 없다. 그런데도 하씨 부부는 “우리 정원은 공원 수준”이라며 자랑했다.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바깥 풍경을 말하는 것이다. 전면으로 담장이 없는 이 집은 동네 들판과 산을 제 정원처럼 품고 있다. 건축가는 거실에서 다실(茶室)로 가는 복도에도 낮고 긴 창을 만들어놨다. 산의 흐름을 방으로 잇고 싶었단다. 반면 다실에선 담장으로 둘러싸인 네모 공간에 소나무 한 그루만 서 있다. 열린 집안에 차를 마시며 응시할 수 있는 정적인 공간을 남겨둔 것이다. 건강한 균형이다.

하씨는 “집에 중요한 것은 장식이 아니라 내 삶과 더불어 끊임없이 길러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인의 소개로 건축가인 이 교수를 만났다는 그는 “조선시대 ‘소쇄원’의 공간연구를 한 이 교수를 믿었다”고 말했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은 한국의 대표적인 민간정원. 바위와 연못, 석축과 담장 등 조경물의 절묘한 조화로 유명하다. 하씨는 마루데크에 올려진 나지막한 담장 한 토막도 자랑했다. 마당 옆으로 보이는 옆집을 시각적으로 막아주는 ‘가벽’이다. 손님이 보기엔 영문을 모를 담장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그는 “운치를 더해주는 벽”이라며 즐거워했다. “소쇄원 8경 중 하나가 담장이라고 합디다. 돌로 쌓은 담장이 서로 통하면서도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 역할을 한다고 하죠.”

◆순응과 파격=자연에 순응하면서도 자유로운 집을 원하는 다인(茶人)의 취향을 살리기가 어디 쉬울까. 하지만 건축가는 한 술 더 떴다. 집터 서쪽으로 묘지가 보여 집을 옆으로 옮길까 고민하는 건축주에게 “묘지 때문에 이 터는 너무 좋습니다”라고 했다. 주인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고 한다. 건축가는 이 집에 전통과 현대를 연결했다. 대청마루 같은 야외 데크는 한옥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대문·마당으로 이어지는 단독주택 입구의 고정관념을 깨고 길에선 주차장과 현관으로 올라가는 계단만 보이는 것도 특징이다. 30대에 집 두 채를 지어보았다는 하씨는 “젊은 사람들에게 꼭 집을 지어보라고 권하고 싶다”고 했다. 집을 지어보면 일의 시작과 끝을 알게 돼 세상을 보는 스케일이 달라지고, 각 과정을 컨트롤하는 법도 배운다는 뜻이다.

글=이은주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이충기=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1960년 서울 생. 성균관대(대학)·연세대(대학원) 졸업. 95년부터 2008년까지 한메건축 대표로 일했다. 주요작으로 경주실내체육관, 가나안교회, 인삼랜드휴게소, 옥계휴게소, 제주전문건설회관 등이 있다. 특히 가나안교회는 ‘길’이라는 디자인 요소를 절묘하게 활용해 ‘열린 교회’의 상징적 이미지를 잘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밖에 농림부 삶의질 평가위원, 서울시지명특별경관설계자, 문화부 문화역사마을가꾸기, 대구 동성로 공공디자인 추진위원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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