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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의 전설들과 함께 세리가 웃고 있었다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플로리다주 세인트 어거스틴 월드 골프 빌리지에 있는 골프 명예의 전당. 골프 빌리지에는 명예의 전당 이외에도 골프 코스 2개와 골프 아카데미 등이 있다.


미국 플로리다주 북동부에 있는 세인트 어거스틴의 월드 골프 빌리지. 빽빽한 오크나무 사이 사이로 햇살에 반짝이는 연두색 페어웨이가 눈을 부시게 했다. 클럽하우스를 지나 조금 더 들어가니 호수 너머로 뾰족한 지붕의 웅장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WORLD GOLF HALL OF FAME’, 이곳이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이다. 플로리다의 따뜻한 바람에 태극기가 펄럭였다. 박세리가 올린 깃발이다. 세계 26개 골프 단체가 모여 만든 이 전당에는 입회자의 출신 국기를 게양한다. 명예의 전당은 최고 선수들과 골프 기여자들의 업적을 기리는 곳이다. 가입자들의 개인 기념품 2000여 점과 비디오·사진 등이 있다.

로비에는 회원들의 이름이 A부터 Z까지 알파벳 순으로 배치됐는데 맨 처음이 에이미 알콧, 마지막이 베이브 자하리스다. 우연이지만 입회자 130명 중 4분의 1이 채 안 되는 여성이 처음과 끝을 장식한 것이 흥미롭다. 다른 스포츠 명예의 전당은 남녀를 따로 운영한다. 사실 명예의 전당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 여성 스포츠도 별로 없다.
회원 중 최연소 입회자도 여성, 바로 박세리다. 메이저대회에서 5승 등 24승을 한 박세리는 2007년 만 29세에 이곳에 들어왔다.

한참 활동하고 있는 20대에 명예의 전당에 들어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명예의 전당 관계자는 “입회 포인트와 10년 투어를 채우면 자동으로 들어오는 LPGA 입회 조항에 대해 개정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남자처럼 40세가 넘어야 한다는 조항을 넣는 방법 등이다. 그렇게 된다면 박세리의 최연소 기록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다.

이곳 회원들은 당연히 모두 거물이다. 회원 명부상의 박세리의 이웃들은 특히 더하다. 프랜시스 오메이가 박세리의 위에 있다. 그는 1913년 20세의 아마추어로 US오픈에서 우승했다. 미국 골프 붐을 촉발시킨 주역으로 명예의 전당은 따로 그의 동상을 세워놓을 정도로 미국 골프계에서는 대단한 인물이다. 미국인이면서도 영국의 R&A 캡틴도 했다. 박세리 아래는 아널드 파머, 오른쪽에는 커티스 스트레인지, 왼쪽에는 골프 설계가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다.

골프의 명예의 전당은 원래 노스캐롤라이나주 파인허스트 골프장 안에 있었다. 골프장 소유주가 1974년 개인적으로 만들었고 첫 입회자는 13명이었다. 그러다 미국프로골프협회(PGA)가 83년 경영을 맡게 됐다. 세인트 어거스틴에 새 건물을 지어 들어온 것은 98년이며 이후 LPGA 협회 내에 있던 소규모 LPGA 명예의 전당도 통합됐다.

명예의 전당에서 처음 만날 ‘골프의 전설’은 누굴까 궁금했는데 의외였다. 전당 회원 중 골프 실력이 나쁜 톱 3 안에 들 만한 사람, 배우 밥 호프였다. 그는 골프를 죽도록 사랑했지만 골프는 그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다. 핸디캡 4로 소개되기도 했으나 실제 실력은 이보다는 더 나빴다고 한다. 그는 “내가 105살쯤 되면 에이지 슈트를 할 수 있을 텐데”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가 바란 105세에 5년이 모자란 100세로 2003년 타계한 그를 위한 특별 전시회가 ‘섕크스 포 더 메모리’라는 이름으로 열리고 있었다. 호프는 골프에서 가장 끔찍하다는 섕크에 대한 기억도 많다.

78년 두 살이던 타이거 우즈가 TV에 나와 퍼팅쇼를 한 적이 있다. 호프가 우즈의 상대였다. 호프는 95년 전직 미국 대통령 3명(제럴드 포드, 조지 HW 부시, 빌 클린턴)과 함께 라운드를 하기도 했다. 그와 절친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도 골프를 발전시킨 공을 인정받아 올해 뒤늦게 이곳에 입회했다. 아이젠하워는 핸디캡 18로 명예의 전당 회원 중 최악의 골퍼다. 명예의 전당 영혼들이 라운드를 한다면 밥 호프의 유일한 밥이 될 것이다.


1.박세리의 얼굴이 부조된 동판. 오른쪽은 일본의 오카모토 아야코다. 2. 박세리가 기증한 기념품을 모은 쇼케이스. 박세리의 사진과 우승컵 등으로 채웠다. 3. 페인 스튜어트의 라커룸에는 그가 즐겨 쓰던 플랫캡과 하모니카 등이 있다. 타이거 우즈와 탁구를 하는 사진도 보인다.


보비 존스와 벤 호건 등 골프 전설들의 발자취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명예의 벽’을 만나게 된다. 회원들의 얼굴이 새겨진 26m짜리 동판이다. 명예의 벽에서 박세리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명예의 전당엔 골프 역사와 과거 용품 등도 전시되어 골프의 발전사를 읽을 수 있다.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의 명물인 스윌컨 다리도 있다. 2005년 오픈 챔피언십 도중 다리 위에서 골프에 안녕을 고한 잭 니클라우스처럼 폼 잡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1880년대식의 공과 퍼터를 이용한 퍼팅 체험도 재미있다. 요즘 유행하는 스크린 골프는 명예의 전당에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골프 연습하라고 만든 게 아니라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 페블비치 등 유명한 골프장들을 체험해 보라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전당은 한적했지만 스크린 골프 앞에는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최근 입회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물품을 기증하고 전당은 쇼케이스에 물품을 따로 전시한다. 박세리도 그중 하나다. 박세리는 자신의 유일한 베어트로피를 포함해 각종 우승컵과 사진, 명예의 전당 입회를 확정하게 한 2007년 제이미 파 오웬스 코닝 클래식 우승 볼 등을 내놓았다. 명예의 전당은 박세리에 대해 “골프의 가장 중요한 개척자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라고 썼다. LPGA 투어를 점령한 한국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이유다. 박세리의 영문 성이 PARK이 아니라 PAK이 된 사연도 소개했다. 박세리가 여권을 만들면서 R을 빠뜨렸고 오히려 흔치 않은 성이 되면서 그를 알리는 데 더 도움이 됐다는 얘기다. 안니카 소렌스탐의 쇼케이스에는 한자로 ‘道’라고 쓴 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명예의 전당의 하이라이트는 멤버의 라커룸이다. 그들이 아끼던 클럽과 우승컵, 기념품 등이 있다. 라커를 들여다보면 골프의 영웅들은 세상을 떠나도 이 라커룸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페인 스튜어트의 라커에는 클럽 이외에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플랫캡, 그가 즐겨 불었던 하모니카가 들어 있다. 톰 카이트는 1992년 US오픈 때 사용했던 골프백과 클럽을 기증했고, 흑인 최초의 PGA 멤버인 찰리 시포드는 PGA 멤버 카드와 우승 당시 스코어 카드, 즐겨 피우던 시거를 넣었다. 여성 골퍼 말린 스트레이트는 캐디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산 클럽과 취미로 즐기던 뜨개질 바늘도 라커에 넣었다. 박세리의 라커에는 98년 US여자 오픈에서 우승할 때 트로피를 들어 올리던 환한 얼굴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나중에 이곳에 올 타이거 우즈는 라커에 무엇을 넣어 둘까. 그의 여인들의 얼굴을 넣어 만든 달력을 두면 대히트를 칠 것이다.


1913년 US오픈 우승자 프랜시스 오메이와 그의 캐디 에디 로우리 조형물 사이에 선 성호준 기자.


전당 건물 옥상에는 트로피 룸이 있다. 메이저 대회와 라이더컵 등 주요 대회의 트로피들이 전시되어 있다. 33m 높이의 트로피 룸에서는 월드 골프 빌리지를 조감할 수 있다. 세계 지도 모양의 연못과 부속 골프 코스 2곳, 숙박시설, 골프 아카데미 등이다.
빌리지의 골프장은 슬래머&스콰이어, 킹&베어 코스다. 슬래머는 샘 스니드, 스콰이어는 진 사라센의 별명으로 두 사람을 기려 만들었다.

2000년 개장한 킹&베어 코스는 아널드 파머와 잭 니클라우스가 공동으로 설계했다. 400개에 가까운 골프장을 만든 두 사람이 유일하게 함께 만든 코스다. 공격적이고 호방한 파머와 냉정한 전략가인 니클라우스의 스타일이 그린 주변에 모두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시대를 대표하는 장타자여서 티잉 그라운드에서는 휘두를 맛이 난다고 한다.

세인트 어거스틴=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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