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클린턴 방북의 전제조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평양에 갈 모양이다.

그가 미국 내의 많은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방북을 결행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의 방북을 굳이 반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의 방북은 구체적인 성과를 담보해야만 하며, 따라서 사전 협상 등 준비단계를 거쳐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일로 본다.

클린턴 대통령이 굳이 북한을 방문하려는 이유가 일부에서 추측하듯 임기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어서인지, 또는 북한 미사일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가 보여서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만약 전자의 이유뿐이라면 그의 방북은 무의미하다. 아무런 사전 정지작업 없이 평양에 가서 성과 없는 협상에 말려드는 사태가 생기면 개인적인 명예 실추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체면도 크게 구기게 될 것이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위상만 높여 줄 뿐이라고 보수주의자들은 비난의 목소리를 높일 것이며, 차기 행정부는 큰 부담을 질 수도 있다.

그러나 대포동 미사일이나 핵무기 같은 대량 파괴무기(WMD)의 개발 중지에 대한 확실한 해결 방안이 보인다면 그런 기회를 굳이 포기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북한으로서도 대북정책에서 강경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미국과의 관계 개선 문제를 매듭짓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징후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 미국측이 유념해야 할 것은 그의 방문이 미사일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 돼야 한다는 점이다.

이미 지난번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방북 때 金위원장은 미사일 발사 매스게임을 보여주며 '이것이 마지막 발사' 라고 말함으로써 미국측에 큰 기대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세로 볼 때 북측 의도는 아직 불명확하다. 북측은 미사일의 전면적인 개발 중지를 약속하고 테러국에서 해제돼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려 할 수도 있고, 대량 파괴무기의 개발 중지 대가를 요구하는 협상을 시작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북측은 둘째 노선을 따라왔다. 만약 북측이 이 정책을 견지한다면 아무런 약속을 할 위치에 있지 않은 클린턴의 방문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북측이 미사일 개발보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우선할 경우 클린턴의 방북은 양국 관계 정상화의 첫 상징적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때문에 클린턴 대통령이 굳이 평양에 가려 한다면 비록 그의 임기 말까지 짧은 기간이라도 북측의 의사를 사전 타진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며 군사적 긴장완화와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을 국제적으로 담보하는 명확한 합의를 먼저 끌어내야 한다. 클린턴의 방북까지 그런 협상의 충분한 시간이 있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