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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고 이종덕 세아제강 명예회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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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해 지금 한 1천여 자회사 공원들과 그 식구 세명씩 쳐도 3천여명이 생활을 할 수 있거던. …성공을 하려면 누구나 먹을 거 다 먹고, 입을 거 다 입고선 돈 못법니다.

남 할 거 다 하구 그래 가지고는 벌 수가 없는 거여. "

"땅 장사하고 무더기 돈을 막 부어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게 번 돈하고 내가 노력해서 번거 하곤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아무리 자기가 회사를 운영한다고 해도 밥 세그릇 이상을 먹을 수 없는 겁니다. 그 외에는 다 세금으로 내야 되구. "

15일 오전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고 이종덕(李鍾德)세아제강 명예회장의 영결예배.

평생 철강 외길을 걸어 세아제강(전 부산파이프)을 일으켜 세운 뒤 지난 11일 88세를 일기로 영면(永眠)한 고인의 육성이 흘러나오자 4백여 추모객들은 새삼 옷깃을 여미었다.

1960년 종업원이 80여명 밖에 안되는 부산철관공업으로 출발한 세아제강은 지금은 연 매출액이 1조원에 이르는 강관업계 굴지의 기업이다.

그 성장 이면에는 구석구석 고인의 근검정신이 배어 있다는 게 주변인사들의 한결같은 전언이다.

세아제강 계열사인 한국번디 김시원 대표는 조사를 통해 이렇게 회고했다.

"70년대초 회장님을 모시고 미국 출장을 갔다가 뉴욕의 한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려는데 짐이 없어졌습니다.

회장님은 당황해 하는 제 옆구리를 쿡 찌르시면서 '이봐, 짐은 내가 싸서 다 날라놓았어. 저 사람들 시키면 돈 줘야 하니까. 아껴야 돼' 라며 빙긋 웃으셨습니다.

식사도 하루 세끼를 제일 싼 2달러짜리 팬 케이크만 먹었죠. 사흘째부터는 목에 쓴 물이 올라왔습니다.

회장님이 '참 맛있구먼' 하실 땐 죽을 지경이었어요. 며칠을 보내고 회장님과 일정이 나뉘게 돼 헤어지던 날, 그렇게 철저히 절약하시던 회장님은 저를 부르시더니 돌아서서 허리춤을 풀어 지금의 수천달러에 해당하는 3백달러를 건네주셨습니다. "

또 다른 직원의 기억.

"회장님은 항상 현장에 있었습니다.

포항공장을 세울 때는 시간을 아끼느라 매번 야간열차로 내려와 새벽부터 직접 파이프를 나르면서 지휘했습니다.

자전거에 공구를 묶어놓고 이곳 저곳을 누비며 설비를 살피기도 했죠. 해외출장을 다녀올 때 중역들이 영접을 나가면 '일이나 하라' 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래도 영접을 나오자 아예 일정을 비밀로 해버렸습니다.

명예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이제 기름값만큼 일을 못한다' 며 승용차를 놔두고 지하철을 이용했죠. 한 번은 비서가 6백원짜리 전철 티켓을 끊어 드리자 '나는 반표(경로우대권)면 돼' 하실 정도였어요. "

그렇다고 고인이 번 돈을 움켜쥐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철저히 납세의무를 이행해 국세청으로부터 3년 연속(73~75년)성실신고 사업체로 선정됐고, 77년에는 사원복지 우수업체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92년에는 해암학술장학재단을 설립해 학생 1천여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벽지에 도서를 기증하는 등 이익을 사회에 환원했다.

요령과 타협을 가장 싫어하고, 현장에서 땀흘려 온 고인의 열정에 힘입어 불황에도 휘청이지 않고 세아의 굴뚝은 지금도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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