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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시인 김정환·정철훈씨 잇따라 시집 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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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모종의 세계관이 파경에 이르렀다. 이데올로기보다 원숙했던 세계관, 이성보다 더 포괄적으로 자신의 몸을 열었던 세계관, 지리멸렬보다 더 큰 상처를 제 창으로 내던 세계관, 비극의 노년으로서 수천 년 문명의 웃음에 이르렀던 세계관, 그런 모종의 세계관이 파경에 이르렀다. 그 파경을 육체적으로 가장 아파하는 것은 시다. "

"모든 헤어진 자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누워 두런두런 옛 얘기를 나눌 아름다운 혁명은 이뿐인가. 내가 아직 살고싶은 것이 있다면 진달래처럼 타오르며 목놓아 울어보는 일일 것이니 시여, 흐느껴라. 꺼이꺼이 울음 울어라. " 이런 비장한 시관(詩觀)을 밝히며 최근 두 시인이 시집을 잇따라 펴냈다.

김정환 시인은 '해가 뜨다' (문학과지성사.5천원)를, 정철훈 시인은 '살고 싶은 아침' (창작과비평사.5천원)을 최근 펴냈다.

이념이나 진보 등 역사를 향한 희망이 현실세계에서 가뭇없이 사라진 시대, 이 두 시인은 그것들을 여전하게 혹은 새로운 시각으로 붙들고 있다.

"억수 같은 비에 어린 시절은 아직 헐벗고 있다/무너진 축대 붉덩물 급류에/낡은 장롱은 아직 떠내려가고 있다/백성들은 역사 속에서 영영 헐벗고 있다/습기 찬 시절 곰팡이처럼 피어나던/희망은 어디서 나와 어디로 갔는가" ( '희망' 전문)

1980년 '창작과비평' 을 통해 등단한 김정환(46)씨는 '지울 수 없는 노래' . '황색 예수전 1, 2, 3' 등 20여권의 시집과 소설집.역사서 등 다양한 방면의 저서를 펴냈다. 이번 시집 '해가 뜨다' 에서 김씨는 역사나 희망 등을 여전히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단순한 이데올로기나 진보를 넘어 총제적인 삶의 구체성에 다가가고 있다. 역사적 희망이 사라져 간 세기, 그것에 대한 추억이나 회한이 아니라 그것을 구체적 삶의 한 자질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가슴 쓰라리던 날, 눈이 왔다/놋주발 식은 밥 위에 날개를 털고 앉았다/장지문 밖은 어둑하게 환하여/펑펑 큰 눈은 오고//먼산을 보며 생각했다/식민의 역사가 없는 그곳/문명보다 높은 지리산에서/운명의 나날을 보내고 싶다//청솔가지 활활 지피면/아궁이에서 불붙는 그리운 이/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한송이, 한송이, 자유로운 피!" ( '눈' 전문)

97년 '창작과비평' 을 통해 나온 정철훈(41)씨의 첫시집 '살고 싶은 아침' 은 80년대 젊은 민중적 서정시의 한 모범 작품들로 읽혀진다.

이 시인에게 있어 민중들의 순명적인 삶과 자유는 현재진행형이다.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거나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도 시인은 그런 아름다운 혁명을 꿈꾸고 있다.

소위 민중의 시대라는 80년대를 고뇌하고 행동하는 젊음으로 통과해온 이 40대의 두 시인에게 있어 아름다운 혁명은 소진된 것이 아니다. 여전히 시로 되살아나며 이 부박한 세상의 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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