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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칼럼] '불평등의 문' 교육제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수십만의 고등학생들이 수학능력시험 성적표를 받았다. 수능은 유례없이 쉽게 출제되었고 그래서 상위 득점자들조차 초조한 심정이다.

얼마 전 수능을 쉽게 출제한 것이 좋은 선택이었는지에 대한 TV 토론에서 교수들과 당국자가 나와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이제 수면 아래 가라앉은 것 같지만 본고사를 일체 불허하는 내년 입시로 인해 다시 뜨거운 주제로 부상할 소지가 있다.

그 토론 프로그램을 볼 때 내내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 이유는 수능 난이도가 정말 중요한 문제는 전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오해말기를 바란다. 나 또한 우리 대학의 입학관리위원이기 때문에 선발의 기준을 정하는 문제가 얼마나 까다로운 일이며, 어떤 제도든 불가피하게 끌어안고 고민해야 하는 사회공학적 문제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위원회를 끝내고 연구실로 걸어올 때면 언제나 그것이 사태의 근본은 아니라는 생각에 빠진다.

*** 선별.배분 위해 지식 전수

일련의 프로세스로서의 교육제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식적으로 평등한 사회성원들을 실제로는 불평등한 사회에 불평등하게 배분하는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는 모든 관심들이 겉으로 드러난 병목인 시험제도에 집중되지만 시험은 거의 출생시부터 진행된 선별과정을 최종 확인하고 그것을 숫자로 전환하는 장치일 뿐이다.

교육제도에 발을 붙여 생계를 구하는 자로서 못할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이 사실에 대해서 별로 분노하지도 않으며,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분노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오히려 사람들이 더 중요한 문제는 교육 제도가 사람들을 분배하게 되는 최종 귀착지인 사회의 불평등 정도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관심을 집중하기 바란다.

그런데도 내가 여전히 착잡하고 좌불안석인 것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재생산: 교육체계 이론을 위한 요소들' (동문선, 2000년)을 읽어서이며, 그를 통해 교육제도가 자신의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상징적 폭력을 저지르고 이차적 상처를 유발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하나의 교육제도는 선별의 기능을 완수하기 위해서도 사람들에게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 교육제도는 선별 기준을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길어올림으로써, 즉 자신이 일상적으로 가르치는 지식으로부터 이끌어냄으로써 자율성의 가상을 획득한다.

그리고 지식의 전파, 그것만을 자신의 임무로 내세운다. 그러나 그 지식이라는 것이 이미 선별된 것이고 궁극에서는 문화적으로 자의적인 것인 때가 많으며, 그 지식을 전달하는 교과서의 언어와 교사의 언어 또한 선별된 것이다.

따라서 선별은 불가피하게 계급적.성적 배제를 낳는다. 문화적으로 미리 배제된 학생들은 자신이 와있을 자리가 아닌 곳에 와 있고 알고 싶지 않은 것을 배우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고 종래 흥미를 잃게 된다.

그러니 교육제도는 처음부터 '학교 실패' 또는 '교육 실패' 를 내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실패는 '시장 실패' 나 '정부 실패' 와는 다르다. 시장이나 정부는 실패할 경우 가혹한 공격을 받지만, 학교의 실패는 그로 인해 공격받기는커녕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공한다.

실패를 통한 성공이라니 기이하지 않은가. 하지만 학교 실패를 끊임없이 학생 실패로 전이할 수 있는 한 그것은 마술적으로 성취된다.

내 학창 시절 경험도 그랬고 지금 대학에서 가르치며 늘 경험하듯이, 학교에서의 교육 장면이란 '자격을 갖춘' 선생이 '선량한' 의도로 '올바른' 지식을 가르치고 학생들은 시험이나 리포트를 통해 '잘못된' 지식을 선생에게 되돌려 보내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이 기이한 순환 과정에서 무엇이 그런 순환을 낳는 원인인지는 철저히 숨겨진다. 다만 한쪽에서는 선생의 분노와 좌절감, 그리고 올바른 답을 제출하는지의 여부에 따른 사랑의 배분이 생겨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잘못된 답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학생의 초조함과 두려움, 성공에 대한 자축의 감정 혹은 심한 자기비하가 생성된다. 이 순간 학교의 실패는 학생의 실패로 전환된다.

*** 학교 실패를 학생에 전가

부르디외가 밝힌 이런 사실은 교육제도 안에 속해있는 선생과 학생 모두에게 매우 우울한 것이긴 하지만 분명한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학교의 실패가 학생의 실패로 전이되는 것에 저항하라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지금은 매년 돌아오는 입시의 계절이며, 이 계절은 많은 사람들에게 성공보다는 슬픔을 낳는 때다.

그 슬픔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지금 자신에게 대학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이 생애에 길게 이어질 그늘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르디외를 빌려 말하거니와 이 계절에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를 '자신의' 실패로 받아들이지 말기 바란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제도의 실패를 문제삼을 수 있게 되며, 자기 모멸의 더러운 감정에서 벗어나 자신을 새롭게 출발시키기 위한 용기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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