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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칼럼] 하나라도 확실하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어느 떠버리가 인공지능 컴퓨터를 만들었다고 수다를 떨자 옆에서 친구가 물었다.

"그러니까 사람 같은 컴퓨터란 말이지?"

"그래.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는 다른 컴퓨터 탓이라고 둘러대는 거야. "

별로 우습지도 않은 이 농담이 문득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최근의 구조조정 논란에 대한 내 나름의 강박관념 때문일지 모르겠다.

*** 구조조정의 虛와 實

구조조정이란 대체로 세계화 유행의 산물이다. 국내 시장이 닫혔을 때 우리는 한 가마에 15만원짜리 쌀을 먹으면서도 별 문제 없이 살아왔다.

그러나 시장을 열어 5만원짜리 미국 쌀이 들어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애국심에 기대 10만원을 더 낼 소비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각국의 생산 조건이 상이한 데도 이처럼 교환 기준만 세계적으로 통일하려는 '폭력적' 시도가 세계화의 경제적 현실이다.

대외 고립을 논외로 한다면 그 유일한 대비는 세계 시장 가격에 맞게 국내의 생산비를 낮추는 노력이다.

이러한 생산성을 높이려는 작업이 구조조정인데, 경쟁력 향상을 앞세운 해고와 임금 억제가 가장 만만한 수단이기 쉽다.

고비용 저효율에 허덕이는 우리 경제의 치부는 무엇보다 과도한 기업 채무다. 영업이익으로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기업과, 거기 돈을 빌려주었다가 엄청난 부실 채권을 떠맡은 금융기관을 살리기 위해 정부는 '기업 개혁' 과 '금융 개혁' 을 서둘렀다.

그 결과 공적자금이란 말만 들어도 납세자는 가위에 눌리고 '1백10조원+40조원' 문답은 전국민이 질력내는 퀴즈 게임 문제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기업 개혁은 퇴출 진단 기업에 그 선고를 재확인하는 절차로 끝났고, 은행 통합 역시 '부실 합작' 의 지주회사 설립으로 공식 임무를 마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국책 연구원이 실패작이라고 고언을 않으랴. 은행에 꿔줄 돈이 철철 넘치는데도 기업은 돈 가뭄으로 난리라니, 이는 곧 기업 개혁의 결과를 은행이 믿지 않는다는 사실 증명 아닌가?

내년 2월까지 다짐한 '노동 개혁' 은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노동시간 단축, 노조 상근자 보수 등 각종 노사 이견에 맞서 여지껏 비틀대던 노사정이 제대로 합의를 이끌어낼지 적잖이 의문이다.

기업과 금융 개혁에는 그래도 부채 회수와 공적자금 투입이란 '무기' 가 있었지만, 노동 개혁에는 양보와 타협의 '박수' 외에 별로 탐나는 담보가 없다.

더욱이 기업 매각과 합병을 독려하려는 고용조정이 개혁의 중심 메뉴라면, 가위 생사를 걸고 노동계가 반발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국제통화기금 관리가 시작될 때 근로자는 처음 당하는 횡액이라 멋모르고(!) 넘어갔으나 지금은 사정이 크게 다르다.

나라 위기에 금반지 뺐던 일을 오히려 후회하고 싶은 심정이다. 불과 2년 사이에 민심이 왜 이렇게 돌변했는지 정권은 거적 깔고 반성해야 하리라.

그래서 말인데 이른바 4대 개혁 가운데 정부가 시범을 보일 대상은 무엇보다 공공 부문이다. 정부가 전권을 가진 공기업조차 제대로 수술하지 못하면서 민간기업에 개혁을 촉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천문학적 부채, 방만한 인력관리, 낙하산 인사의 도덕적 해이 등 다수 공기업의 낭비와 비효율은 시정의 상식과 상상을 불허한다. 사기업이라면 골백번 죽었을 것이 국민의 세금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 공기업부터 개혁해야

따라서 개혁의 메스를 들이댈 환부는 공적자금 못지 않게 공기업 예산의 '불감증' 이다. 공기업 개혁 하나라도 확실하게! 그것이 납세자의 간곡한 당부다.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고 다른 기계를 탓하는 컴퓨터의 지능은 애교로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자기 개혁에는 주춤거리면서 남의 개혁만 닦달한다면 이는 정부 체통과 형평성 시비를 넘어 직무유기 조항에 걸린다.

금융계와 몇몇 공기업의 파업을 막기 위해 정부가 이들 노조와 '이면 계약' 으로 추한 거래를 했다는 소문(?)마저 나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부는 개혁을 내걸고 개혁의 희화(戱畵)를 그린 셈이다. 실로 "개혁도 아닌 것이, 개혁이 아니지도 않은 것이" 타령으로 끝내지 않을 매섭도록 단호한 결의와 실행만이 '집권 후반기 증세' 에서 벗어나는 확실한 길이다.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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