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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4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46. 서울서 출혈열 발생

가까스로 인디언들의 오해를 벗어나긴 했지만 이후에도 괴질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된다. 의학적으론 이 괴질의 원인 바이러스가 한탄바이러스와 유사한 바이러스였으므로 상위 개념인 한타바이러스 속(屬)에 포함되는 종(種)의 하나로 분류된다.

문제는 이름을 어떻게 붙이느냐였다. 처음엔 지명의 이름을 따 포코너바이러스라 명명했다.

포코너(Four Corner)란 인디언 보호구역이 뉴멕시코.캘리포니아.아리조나.콜로라도의 4개 주가 인접한 지역이란 뜻이다.

대개 새로운 바이러스의 이름은 한탄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처음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이 경우 자신들의 주 수익원인 관광사업이 큰 타격을 받는다며 반대했다. 그래서 바꾼 이름이 무에르토밸리(Muerto valley)바이러스였다.

무에르토밸리란 스페인어로 '죽음의 계곡' 이란 뜻으로 첫 희생자가 살았던 계곡의 이름이었다. 지금도 일부 의학교과서엔 무에르토밸리 바이러스란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엔 인디언들이 자존심을 들고 일어났다. 죽음의 계곡이란 이름이 이곳에서 스페인군과 인디언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가 인디언들이 전멸했기 때문에 승리감에 도취한 스페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란 것이었다.

독자들은 사소한 것 갖고 별 항의를 다한다고 하겠지만 학명이란 일단 붙여지면 대대손손 남는 것이므로 그렇지 않아도 백인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인디언들의 항거는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급기야 클린턴미국대통령까지 이 문제의 진화에 나서게 됐다. 클린턴대통령은 인디언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미질병예방통제센터(CDC)에게 새로운 이름을 정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 신놈브레(sin nombre)바이러스다. 신놈브레란 '이름이 없다' 란 스페인어로 하도 말이 많으니까 학명을 정하는 CDC관계자들이 아예 '무명의 바이러스' 란 전무후무한 이름으로 결정해버린 것이었다.

이처럼 바이러스 이름 하나로 난리법석을 떤 인디언들의 사례에 비하면 나는 행운아라 할 만하다. 한탄바이러스란 이름을 한탄강 유역 주민들의 반대없이 명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지명이 붙은 바이러스 때문에 필자가 발견한 한탄바이러스가 유일하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서울시민들에겐 미안한 일이기도 하지만 필자가 명명한 '서울바이러스' 도 있기 때문이다.

1979년 11월26일의 일이다. 연구실에서 유행성출혈열 발생환자들의 지역적인 분포를 살피고 있던 필자는 하루전 검사를 끝낸 환자의 거주지를 유심히 살펴봤다.

아파트 수위였는데 주소가 서울시내 마포구가 아닌가. 대부분의 환자가 경기도 북부의 농촌지역에서 발생하는데 이 사람은 매우 특이했다.

혹시 경기도 북부로 여행하거나 성묘를 했을 수도 있지만 수위란 대개 하루씩 교대 근무할 터이므로 서울을 벗어나지 않고 감염됐을 가능성도 생각해봤다.

아니나다를까 조사해 보니 이 환자는 지난 1년간 한번도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아현동의 한 아파트에서 수위로 일하고 있었는데 내게 귀가 솔깃한 이야길 했다. 증상이 나타나기 나흘전 아파트 경비실에 들어온 집쥐 한마리를 때려잡은 적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친구와 경비실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쥐가 들어와 문을 닫고 수십분동안 연탄집게로 진땀을 흘리며 잡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바닥에 묻은 쥐의 오줌와 피를 걸레로 닦았다고 털어놨다. 나는 직감적으로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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