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도요타 함부로 차지 마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저주’ 쪽에 방점을 찍는 도요타맨들은 두려운 표정이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우선 미국 고속도로 순찰대원이 숨지기 직전 다급하게 911전화 메시지를 남긴 게 그 첫째다. 가속페달·브레이크 등 생명에 관련된 ‘보안 부품’이 도마에 오른 것도 문제다. 미 국민의 예민한 정서를 자극한 만큼 파괴력은 폭발적이다. 찜찜한 대목은 근본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리콜이 진행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바닥매트나 가속페달을 바꾼다고 말끔히 끝난다는 보장이 없다. “아무리 도요타가 적극적인 리콜을 해도 소비자들의 막연한 불안심리까지 씻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소비자원 손성락 소비자안전국장의 진단이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한꺼번에 1000만 대의 차량을 리콜할 수 있는 기업이 얼마나 될까. 도요타의 저력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괴력의 원천은 60조원이 넘는 내부유보금. 도요타는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서 단시간에 230만 개의 가속페달을 조달해 미국에 공수했다. 미국에만 1300개가 넘는 딜러망과 촘촘한 서비스센터를 거느리고 있다. 도요타는 미국 정부와 언론이 압박하자 자신 있게 리콜 카드를 빼들었다. 엄청난 자금력과 전 세계에 걸친 물류망, 정비 인력, 상세한 고객 정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미 정치권과 언론이 공격하는 도요타의 전자제어장치는 판도라의 상자다. 어떤 자동차 메이커도 자신 못하는 부분이다. 요즘 영어권에선 자동차 시동을 켤 때 ‘이그나이트(ignite)’와 ‘부트(boot)’라는 표현을 섞어 쓴다. 자동차의 전자 비중이 35%에 이르면서 컴퓨터나 다름없게 됐다. 부품 수와 무게를 줄이고 연비를 높이려면 전자화밖에 없다. 하지만 기계쟁이들도 전자에는 약할 수밖에 없다. 고열과 한파에 노출된 자동차 전자 부품은 언제 전자파 간섭을 일으킬지 모른다. 기계적 결함과 달리 사고가 나도 재현하거나 원인 입증이 어렵다. 벤츠나 BMW 등 고급차까지 똑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

빅3 등 경쟁업체들도 대놓고 도요타를 비난하지 않는다. 반격의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이미 세계 자동차 시장은 초성숙 단계다. 기술은 평준화되고 원가 경쟁만이 살 길이다. 미국은 도요타가 영업이익의 절반을 거둬들이는 주력 시장이다.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도요타가 리콜 사태가 진정되는 대로 대대적인 할인행사를 예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장점유율을 되찾으려 칼을 갈고 있는 것이다. 리콜 사태가 도요타의 근본적인 경쟁력을 훼손시킨 것도 아니다. 도요타에는 아이치현 출신의 충성스러운 중간관리자들이 곳곳에 박혀 현장을 리드하고 있다. 안정적인 노사관계와 충성도 높은 고객은 큰 자산이다. 부채비율 제로에다 쌓아둔 실탄도 막대하다.

리콜 사태로 도요타가 휘청대는 것은 사실이다. 엔화 강세는 위협적이고, 100만 대 이상의 과잉 설비도 부담스럽다. 하지만 도요타는 위기를 딛고 커온 기업이다. 패전과 오일쇼크를 뚫고 한 계단씩 전진했다. 도요타는 엎드려 있을 때가 더 무섭다. 세계 1위를 눈앞에 두고도 “일본이 자동차에서 독자 발명한 것은 사이드 미러 접는 장치뿐”이라고 몸을 낮춘 기업이다. 세계 언론의 도를 넘는 도요타 때리기를 보면서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의 연탄재를 생각했다. ‘도요타 함부로 차지 마라/너는/한번이라도 도요타만 한 적 있었느냐.’ 감정을 접고 도요타가 어떻게 시련을 헤쳐나가는지 관심을 돌릴 때다. 논설위원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