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 시(詩)가 있는 아침 ] - '안개의 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김광규(1940~ ) '안개의 나라' 전문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안개의 나라'는 부조리한 현실세계를 풍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적 관습이라든가 시대적 상황(4.19나 5.18 등)을 나타낸다. '안개에 익숙해져/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가슴을 친다. 정착된 선(善)보다 맞서야 할 악(惡), 굴종적인 도덕보다는 불행한 투쟁을 택하는 것이 시인의 삶이다. 시도 한 시대를 관통하는 생물이며 그 정신은 바람을 예감하는 풍향계이고, 새벽을 알리며 홰를 치는 수탉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송수권<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