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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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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 1920년대 영등포역과 시가지 풍경

아버지는 뒤쪽의 공터도 사서 집을 뒤로 늘리고 널판자로 담장을 막고는 수도를 놓고 광을 만들고 뒷간도 담 옆에 지었다. 왜 가죽나무 집이냐 하면 그 로터리 앞에서 이어진 신작로 가의 가로수가 모두 가죽나무였다. 아카시아처럼 작은 타원형의 잎이 무성하게 달리고 가을에는 콩깍지 같은 열매가 매달리는 요즈음에는 보기 힘든 나무다. 우리 집 앞의 길가에도 그 나무가 있었지만 아마도 전의 집 주인이 옮겨다 놓았던지 아니면 잘못 심었는지, 아버지가 사들여 마당이 되어버린 뒤뜰에도 그 가죽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나무는 우리 가족과 더불어 전쟁도 겪고 아버지 돌아간 뒤 어머니가 집을 팔기 위해 새로 늘리고 수리하는 북새통 속에서 베어졌다. 가죽나무와 플라타너스 나무를 섞어가며 심어놓았는데 영등포는 일본인들이 세운 산업지대였다. 물론 서울도 그랬지만 영등포는 시내에서 조금만 걸어나가도 논밭이 널린 시골이었다. 그리고 도심지와 외곽을 가리지 않고 주택가가 아닌 곳에는 어디에나 공장의 굴뚝이 보였다. 운송 때문이었는지 도심지를 가르고 들어오는 철길이 사방에 있었고 도로도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었다. 길 어디에나 흙과 석탄이 섞인 땅이 많아서 비만 오면 검은 흙탕물이 고였다. 시멘트 노관이나 철근 교각 따위가 공터에 쌓여있기도 했다. 숫제 우리 집 건너편에 있던 학교의 모퉁이에는 언덕 전체가 석탄더미였다. 아이들은 그 위에 올라가 연을 날리기도 했다.

영등포의 중심가는 남으로는 역전에서 시작하여 로터리를 지나 북쪽 우리 동네 경계 부근까지, 동으로 구청을 지나 로터리를 지나고 서쪽 새마을로 넘어가는 철길까지였다. 중심으로 갈수록 일본식 집이 많고 점포도 대개는 일제시대부터 내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동네 부근에 오면 한옥들이 많았다. 공장 부근으로 가면 영단 주택이라고 하여 회사에서 똑같은 모양으로 지어 사원과 근로자들에게 분양한 단층 일본식 집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중년이 넘어서야 일본에 처음 갔는데 도쿄의 메구로에서도 세 정거장이나 사철로 나가서 있는 니시고야마(西小山)라는 동네에서 몇 달 지낸 적이 있다. 나는 밤에 후배의 안내로 그곳에 갔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고 있다가 이튿날 한가한 마음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나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오른 듯한 느낌이었다. 그곳은 내 어린 날의 영등포 중심부와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길 모퉁이의 붉은 우체통,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제과점, 그 진열장, 그 양과자들, 저 건너편 이층집의 격자 창문과 위에서부터 절반쯤을 덮으면서 이어 내려온 널판자 담벽, 또는 거칠게 흩뿌린 듯한 시멘트 담벽의 질감, 선술집에 늘어진 휘장과 나무 여닫이 문, 문방구의 유리 진열장과 돔보 연필과 크레용, 시장의 풍경들, 콜타르를 입힌 나무 전봇대의 모양까지 같았다. 누군가와 근대 얘기를 하다가 식민지 근대가 화제가 되어서 나는 영등포와 도쿄 외곽에 대한 얘기를 했던 적이 있다. 거기서 동네를 배회하다가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영등포 역전 부근에 남아있던 옛날식 다방과 카운터며 주방의 위치까지 비슷한 끽다점을 발견하고 시인 이상의 생각이 났다. 이제는 새마을 시절에 초가집과 더불어 다 없어졌지만 그런 흔적은 아직도 한적한 읍 단위의 시골 역전에 가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다만 이층 목조가옥의 앞을 헐어내어 타일을 붙이는 식으로 개조는 되어 있지만.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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