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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합작영화 '순애보' 관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이정재는 이재용 감독을 "참 편안한 사람" 이라 평한다.

이정재가 주연한 '정사' (1998년)로 데뷔한 이 감독은 '순애보' (純愛譜)에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키치적 취향이 묻어난다" 고 말한다.

감독과 주연의 두 대답은 이 영화를 읽는데 큰 도움이 된다.

편안한 감독과 호흡하며 작업한 이정재는 능글맞기까지 한 연기로 시선을 끌어당기고, 이 감독의 재치와 키치적 순발력은 디테일에서 성공을 이뤄내며 영화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더한다.

억지로 숨을 참아서라도 죽고 싶은 재수생 아야(다치바나 미사토). 죽기 위해 돈을 모으고, 남들에게 죽은 날을 헷갈리게 하고 싶어 굳이 죽음의 장소를 날짜변경선으로 상상한다.

일상의 권태로움이 표정에서부터 읽히는 동사무소 직원 우인(이정재). 아이스크림을 먹고 남은 막대기로 실없이 벽을 훑으며 지나가고 셔츠의 단추는 언제나 목까지 꼭 잠근다.

우인은 동사무소에서 만난 미아(김민희)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여지없이 채인다. 풀이 죽은 우인은 혼자 외로움을 달래다 인터넷에서 운명처럼 아사코를 만난다.

아사코는 죽기위해 돈을 벌려고 인터넷 동영상 모델로 나선 아야의 예명. 그들의 인연은 예사롭지 않다.

서울과 도쿄에 각각 살고 있는 우인과 아야가 알래스카에서 만나기까지의 인연은 곧 그들에겐 운명이다.

'순애보' 는 디테일에 성공한 영화라 감상 포인트가 넓다. 감독은 과한 스케일 담아내기나 메시지 우겨넣기 대신 일상 속에 사소하고 기발한 코드들을 적절히 변주시킨다.

장 뤽 고다르가 그의 여주인공에게 입힌 의상이 그대로 등장한다거나 루이스 브뉘엘의 영화 제목이 영화 속 스튜디오 간판으로 걸리는 것이 눈에 띄는 설정들. 미아의 옷에 새겨진 포도를 우인이 혼자 애처롭게 따먹고, 아야가 장난치며 먹던 수박은 우인의 욕조 속을 둥둥 떠다닌다.

우인이 아야와 지하철에서 지나치며 부딪히는 순간, 손가락의 상처가 아파 "아야" 라고 소리지르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만남은 불가능했을 지 모른다.

'모래시계' 의 과묵한 재희 이미지는 이정재에게 지금까지 오히려 그의 짐이 됐을까. '태양은 없다' 에서 비열하고 유치한 양아치 연기를 춤추듯 그렇게 신나게 했던 그가 유약하고 좀 모자란 듯한 우인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정통 멜로보다는 주류에서 벗어난 역이 그를 더 돋보이게 할 것 같다.

여기에 익숙한 풍경에서 읽어내는 표정들, 즉 새벽 남산의 고요와 일상의 피곤이 묻어있는 달동네 골목길', 그리고 도쿄의 단정한 공원들은' 등은 배우가 감독에게 느낀 편안함을 그대로 전한다.

그러나 디테일의 나열 뒤에 늘어지는 드라마는 영화가 길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상영시간도 두 시간으로 꽤 길다.

감독이 우연도 알고보면 필연에 다른 모습이기에 선택했다는 우인과 아야의 해피엔드성 만남도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

'순애보' 는 일본의 쇼쿠치와 국내 시네마서비스가 제작비.스태프.출연진 등에서 제대로 공조한 첫 한일 합작 작품.

일본 CF.드라마에서 스타의 자리를 굳힌 다치바나 미사토가 처음 영화에 출연했고, '일본의 명계남' 으로 불리는 오기스 렌이 아야의 아버지로 나와 합작의 모양새가 살았다.

신용호 기자

우연과 인연의 앞 글자에서 이름을 딴 우인, 수필 '인연' 의 아사코(朝子)가 예명인 아야. '순애보' 는 인연에 관한 이야기다.

우연은 알고 보면 우연이 아닌, 인연인 것을…. 사소함은 사랑을 향한 디딤돌이 되는 것을…. 연애 장면이 없어 색다른 멜로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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