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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3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38. 불행중 다행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월계관을 쓴 승자에게 모든 영광이 주어지는 냉혹한 학문의 세계에서 연구결과의 조작은 비일비재하다.

80년대초 세계최고의 암치료병원으로 평가받고 있는 미국 뉴욕의 슬론케터링암센터에서 흰 쥐에게 검은 쥐의 피부를 이식시켜 성공했다는 논문이 저명한 의학잡지 NEJM에 게재돼 세계가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이는 종(種)이 다른 개체 간에는 피부이식이 불가능하다는 종래 학설을 뒤집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언론은 흰 쥐의 몸에 이식된 검은 쥐의 검정색 피부반점 사진을 일제히 소개했다.

그러나 1년 뒤 이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알고 봤더니 출세욕에 불타 있던 인도출신 연구원이 어처구니없게도 까만 볼펜으로 색깔을 덧씌웠다는 것이 아닌가.

이 사건으로 슬론케터링암센터의 소장이 연구결과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발표했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에이즈바이러스의 발견도 마찬가지다. 81년 미국LA의 동성연애자에게 정체불명의 괴질이 처음 나타났을 때 전세계 석학들이 원인 병원체를 찾기 위해 매달렸다.

83년 프랑스의 파스퇴르연구소 몽타니에박사팀과 미국립보건원의 갈로박사팀이 동시에 에이즈바이러스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알고 봤더니 미국립보건원의 갈로박사팀이 몽타니에박사팀이 보내온 바이러스 샘플에서 일부를 떼어내 자신이 발견한 바이러스로 둔갑시켜 발표했다는 것이 아닌가.

하기야 전자현미경으로 겨우 보이는 바이러스를 모양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으므로 갈로박사의 에이즈바이러스가 몽타니에박사의 에이즈바이러스에서 빼내온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프랑스측으로서도 미국측이 자신의 연구결과를 도용했다는 심증은 가지만 확증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의 유전정보를 실험실에서 대량 증폭할 수 있는 PCR(중합효소연쇄반응)기법이 도입되면서 들통이 나고 만다.

90년대초 PCR기법으로 에이즈바이러스의 유전정보를 낱낱이 분석해보니 프랑스팀과 미국팀의 유전자가 99% 이상 일치하는 것이 아닌가.

에이즈바이러스는 돌연변이를 일으키므로 어떤 경로를 통해 분리해내든 유전자가 최소한 7% 이상 달라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91년 갈로박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지만 고의가 아닌 실험실의 우발적 사고였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샘플이 뒤바뀐다는 것은 한평생 미생물을 연구해온 내가 보기에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철저한 라벨링은 실험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갈로박사의 변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갈로박사는 미국립보건원에서 쫓겨나고 미국은 프랑스에 에이즈 진단기법에 대한 로열티를 지급해야 했다.

엉뚱한 레오바이러스를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로 잘못 알고 덜컥 논문을 게재한 나로서도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잘못은 인정해야겠지만 최소한 고의는 아니었음을 밝혀야했다. 실수야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지만 고의는 학계에서 영구적으로 추방당해야하는 중대한 범죄다. 다행한 것은 당시 실수가 실험재료를 공급한 미육군의학연구소의 잘못으로 밝혀진 것이다.

우리가 실험재료로 사용한 것은 돼지의 콩팥세포였는데 미육군의학연구소의 실수로 무균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레오바이러스로 오염된 샘플이 공급된 것이었다. 이는 우리만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 연구진에도 공급되어 우리가 똑같은 결과를 낳았다.

실험재료를 담당한 미육군의학연구소 직원은 해고됐다.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를 세계최초로 전자현미경 촬영에 성공했다는 우리 논문이 실수일지언정 고의적 조작은 아니었음이 가까스로 밝혀진 순간이었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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