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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프런트] 프로라이프 의사회 ‘낙태병원’ 고발 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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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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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낙태 근절 운동을 벌이고 있는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낙태 병원’ 고발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의사가 의사를 고발한 일이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정부의 단속 의지가 미흡하다며 공격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 때문에 상당수 병원이 낙태를 중단하고 있고 발걸음을 돌리는 환자가 늘고 있다. 지난해 11월 정부가 불법 낙태 단속 방침을 밝혔을 때도 ‘빤짝’ 반응이 있었다. 하지만 논쟁이 본격화한 이번에는 그 양상이 달라질 전망이다. 정부는 낙태 단속에 머뭇거리면서 한편으로는 낙태를 줄이기 위한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눈치보는 산부인과들
월 50~100건 다뤘던 의사, 메스 놓고 사태 추이 관망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한 산부인과병원은 지난해까지 매달 50~100건의 낙태수술을 해 왔다. 건당 30만~40만원을 받았는데 수술이 많은 달에는 4000만원까지 벌었다. 하지만 올 초부터는 낙태수술을 하지 않고 있다. 낙태를 원하는 여성들이 지난달 말까지는 수술이 가능한지 문의해 왔으나 지금은 이마저 끊긴 상태다.

이 병원처럼 상당수 산부인과 병원이 낙태수술을 중단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의 산부인과 개원의 S씨는 “지난해 말 자정운동이 시작되면서 낙태수술을 중단한 의사들이 적지 않은데 그나마 조금씩 하던 곳조차 고발장 접수 후엔 거의 안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의사들 가운데는 이번 기회에 불법이든 합법이든 정부가 확실히 정리해주길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완전히 중단했다기보다는 일단 바람을 피하기 위해 사태 추이를 관망하는 곳이 더 많은 분위기다. 인천의 모 산부인과 병원 H원장은 “(낙태수술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며 “지역 산부인과 의사들과 잇따라 모임을 열고 대책을 논의했지만 뚜렷한 방안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병원은 지난해 11월부터 낙태수술을 하루에 한두 건으로 줄인데 이어 12월 초부터는 중단했다. H원장은 “당분간 분위기를 지켜볼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서울 강남의 한 산부인과는 미혼 여성을 위한 임신·피임 관련 비밀 상담을 홍보하고 있다. 이 병원은 아이 낳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확인되면 “병원을 방문해서 상담해 달라”며 사실상 낙태수술을 권하고 있다. 이 병원의 주말 예약은 꽉 차 있었다.

일부 산부인과 의사는 이런 상황이 몰고 올 부작용을 우려했다. 인천의 H원장은 “작은 병원에서 숨어서 낙태수술을 하다 세균에 감염되거나 마취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병원들이 위험 부담 비용까지 요구하면 수술비가 오를 것이란 얘기다. 서울의 한 산부인과 의사는 “단속이 심하지 않은 지방에 가서 낙태수술을 받는 환자들도 있다”고 말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심상덕 윤리위원장은 “이전에도 돈이 없는 어린 임신부들이 조산소 등에서 위험하게 낙태수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런 걸 줄이기 위해서도 더 엄격하게 불법 낙태를 막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중절 원하는 여성들
병원 왔다가 거절당하고 난감
시술 계속하는 곳엔 사람 몰려

휴일인 7일 오후 2시 서울 강남구의 A산부인과. 10여 명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료실에서 나온 20대 여성은 군복을 입은 남성에게 “이젠 안 된다고 하는데 어쩌지”라며 울상을 지었다. 낙태 수술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거절당한 것으로 보였다.

이 병원은 인터넷상에서 낙태 수술을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병원 홈페이지엔 “수술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는 문의 글이 하루에 10여 개씩 올라오고 있다.

5일 오후 6시30분 서울 서대문구 B산부인과에도 30여 명의 손님이 있었다. 미혼으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절반이나 됐다. 20대 초반의 남녀 네 쌍도 보였다. 기자가 환자처럼 출입문에 들어서자 간호사는 “접수하지 않으면 안쪽으로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기자는 전화로 “낙태 수술이 가능하느냐”고 문의했었다. 그때 간호사는 “그런 수술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직접 물으니 “상담 후 태아가 몇 주 됐는지 초음파 검사는 할 수 있다”며 모호한 입장으로 바뀌었다.

‘낙태 문제’가 사회 이슈화하는 상황에서도 낙태 수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병원에는 여성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반응도 다양했다. 병원에서 만난 20대 중반의 한 미혼 여성은 “원치 않는 임신을 했는데도 무조건 낳으라는 얘기냐”고 말했다. 한 30대 주부는 “무조건 낳으라고만 하면 아이는 누가, 어떻게 키우느냐”며 "낙태를 너무 엄격하게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밝힌 40대 주부는 “고귀한 생명을 지울 수는 없으며 낙태는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터넷에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한 남성 네티즌은 포털사이트에서 “최근 부인이 계획에 없는 임신을 했지만 동네 산부인과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맞벌이 부부의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조건 낳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서울시내 한 대학교의 익명 게시판에는 “결국 이런 식으로 가면 (낙태) 수술비만 올라 청소년이나 돈 없는 여성들이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글이 실렸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윤상 소장은 “여성이 낙태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이중적인 성 문화와 미비한 사회 제도 때문”이라며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여성에게 원치 않는 출산을 강요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정선언·박정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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