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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그때 오늘

학생운동의 정신적 추동력 된 2·8독립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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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3·1운동에 앞서 2·8독립운동을 주도한 조선청년독립단원들(『사진으로 엮은한국독립운동사』, 눈빛, 2005). 앞줄 왼쪽부터 최원순, 두 사람 건너 장영규.가운데 왼쪽부터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 뒷줄왼쪽부터 한 사람 건너 변희용, 강종섭, 이봉수.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7년 전부터 웅변대회 등 각종 집회와 기관지 『학지광』을 통해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있던 동경유학생학우회 소속 유학생들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 받아 독립 쟁취를 위한 행동에 나섰다. 도쿄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 600여 명이 구름처럼 모여들자 유학생 대표 백관수는 조선청년독립단 명의의 조선독립선언서를 큰 목소리로 낭독했다. 선언식이 끝나고 가도로 나선 학생들은 급거 출동한 일경과 육탄전을 벌인 끝에 강제 해산되고 주동자 30여 명은 감옥에 갇힌 몸이 됐다. 그때 그들은 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2·8독립운동은 그날의 선언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국가와 민족의 자주독립이 시대적 과제이던 일제하 2·8독립운동은 3·1운동(1919), 6·10만세운동(1926), 광주학생운동(1929)으로 이어지는 학생 독립운동을 촉발한 신호탄이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000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만국 앞에 독립을 이룩하기를 선언하노라. 4300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실로 세계의 오랜 민족의 하나이라. 비록 중국의 책봉을 받은 일은 있으나, 이는 양국 왕실의 형식적 외교관계에 불과하였고 조선은 항상 우리 민족의 조선이고 한 번도 통일한 국가를 잃어버리고 이민족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일이 없도다.” 그때 그들의 머리와 가슴은 스스로 민족의 고통을 대변하는 선구자적 사명감과 민족의 자유와 독립 쟁취를 외친 강렬한 민족애로 넘쳐흘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의 선진국의 모범을 취하야 신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민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함이 있을 줄을 믿노라.” 그들은 왕정을 되살리는 복벽(復辟)적 국권회복운동을 넘어 이 땅에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공화국을 세우고자 했다. “역사의 생생한 발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우리와 자손의 건전한 번영과 행복을 위하여 우리는 선두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4·19혁명 당시 나온 고려대와 연세대 학생들의 선언문에 잘 나타나듯, 2·8독립운동을 이끈 이들의 강렬한 선구자 의식과 민족애, 민주주의 정신은 일제하는 물론 해방 후 민주화를 이끈 학생운동의 정신적 추동력의 원형이었다. 앞서 산 이들의 희생을 딛고 독립과 민주화를 일군 오늘. “더없이 고귀한 민족의 생존”만이 아니고, 지구 마을 전체 차원에서 더불어 살기를 고민하는 열린 민족의식과 사명감으로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운 세계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이 이 땅의 청년학도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일 터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