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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동물의 목숨도 중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일전에 양다리가 잘린 사슴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밀렵꾼들이 설치한 덫에 발목이 걸려 사슴이 며칠을 움직이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었다.

발목이 꺾이고 털 껍질이 벗겨졌으니 말 못하는 짐승이 얼마나 아팠을까. 야생동물 보호관계자들이 그 사슴의 다리를 절단하고 치료한 후에 산으로 보내주었다. 두 발이 없는 사슴의 고통과 불편을 생각하면 무척 속상하고 죄스럽다.

우리는 무심히 가죽옷을 입는다. 밍크코트 한 벌을 만들려면 밍크 수십마리의 털이 필요하다는데, 그 껍질 안에 있었을 생명의 죽음은 모르는 체 하고 털의 아름다움만 생각한다.

영화 '101 달마시안' 속의 악녀 크루엘라는 예쁜 점박이 강아지 1백1마리를 죽여서 그 가죽으로 코트를 만들려고 한다.

영화가 과장해서 표현했지만 우리가 그토록 독하지는 않더라도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며칠 전 신문에 미국 볼티모어시 동물보호단체의 이색 시위사진이 있었다. 두명의 여인이 발가벗은 상태에서 "인간의 가죽에 동물의 가죽을 입히기 위해 피혁제품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는 피켓을 들고 시내 중심가 쇼핑몰 앞에 서있는 장면이다.

불교인들 가운데는 일절 피혁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나체쇼를 하면서까지 동물보호 운동을 하지는 않는다. 피혁제품 사용은 물론 제조까지 반대하는 운동을 보고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업장이 두터운 나는 큰발에 맞는 기성제품 고무신을 구할 수 없어 가죽으로 신을 만들고, 시중에서 동물의 시체를 먹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업이라는 습관의 연속성과 윤회를 가르친다. 반복은 관성을 낳고, 사람은 그 업에 의해 하늘.사람.축생.지옥 등으로 윤회한다는 것이다. 화를 잘 내는 이는 독사가 되고, 어리석은 이는 소가 된다. 싸우기 좋아하는 이는 아수라가 되고, 욕심이 많은 이는 지옥에 떨어진다.

우리가 현재에 사람으로 살고 있지만, 마음 속에 탐욕.성냄.허황이 있다. 과거생의 동물성을 나타낸다. 무량겁에 걸쳐 몸을 바꿔 태어나면서, 저 짐승들이 우리의 부모.형제자매.자녀 또는 배우자였을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묻는다. "동물은 전생의 우리 가족이니 일절 고기를 먹지 말라는 거냐" 고. 현실적으로 육식하는 것을 죄악시할 수 없다. 개개인의 전생을 따져 이산가족을 찾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육식을 하더라도 동물에 대해 미안한 생각을 하고, 방생으로 보답하겠다는 다짐 정도는 하자는 것이다.

나는 동물의 생존권을 중히 여기는 도반과 지낸 적이 있다. 그는 쥐를 잡더라도 바로 죽이지 않는다. 재래식 화장실에 가둬 놓고는 변을 먹으면서 자라게 한다. 재미로 목숨을 빼앗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도 파리나 모기에까지 불살생 원칙을 지키지는 못한다. 농작물의 해충 피해를 막기 위해 농약도 뿌린다. 유해.무해 또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필요에 의해 죽여야 할 것을 결정한다. 그러면서도 산 것을 죽일 때는 좋은 곳에 태어나길 빈다.

부득이 가죽옷을 입고 가축을 잡아먹더라도 생명을 중히 여겨야 한다. 동물에까지 사랑의 폭을 넓힐 때 그 자체가 우리가 '동물' 이 아닌 '인간' 임을 나타낸다.

석지명 <법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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