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월드워치] 미국-베트남 '미완의 화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냉전 시절 미국은 두 종류의 전쟁을 치렀다. 소련과는 핵무기를 바탕으로 한 공포의 균형으로 평화 아닌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제3세계 국가에선 공산세력의 확대를 막기 위해 직접 전쟁에 개입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목적은 '대국(大國)으로서 신뢰성 유지' 였다. 동남아에서 공산주의를 막지 못하면 국제정치 전반에서 미국의 지위가 흔들릴 것을 우려했다.

이에 대해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전쟁이 민족해방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은 수십년 동안 제국주의 외세와 싸워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트남전쟁이 아니라 '미국전쟁' 이라는 표현을 쓴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은 어디까지나 미국이며 자신들은 이에 항거했을 뿐이라는 얘기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공산군에 함락됨으로써 베트남은 통일됐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3백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국토는 황폐화했으며, 경제는 파탄상태였다.

20년이 지난 95년 수교로 베트남과 미국 관계는 정상을 찾았지만 미국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원한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미국 역시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입었다. 미국인들에게 베트남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다. 국가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으며, 엄청난 물적.인적 손실을 입었다. 3천5백억달러라는 막대한 전비(戰費)를 소모했으며, 5만8천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살아남은 참전용사들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지뢰 3백50만개와 30만t에 달하는 불발탄으로 매년 2천명이 목숨을 잃는다.

특히 고엽제 피해는 심각하다. 미군은 작전에 방해가 되는 정글을 제거하기 위해 맹독성 물질인 다이옥신이 함유된 고엽제 2천만 갤런을 쏟아부었다.

이로 인해 국토의 7분의 1이 오염됐다. 고엽제 피해자는 1백만명이나 되며 이 가운데는 선천성 기형으로 태어난 15만명이 포함돼 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일 때 빌 클린턴은 대학생 신분이었다. 그는 징집을 피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로즈장학생으로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클린턴은 런던에서 베트남전쟁 반전(反戰)데모를 주도했다.

훗날 미국대통령이 된 클린턴은 베트남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94년 대(對)베트남 경제제재를 해제한 데 이어 이듬해 정식 수교했다. 지난 7월엔 무역협정을 체결해 본격적인 경제협력의 토대를 마련했다.

지난 16~19일 베트남 방문은 클린턴이 자신의 임기 중 추진해온 베트남문제 해결을 마무리짓는 데 의미가 있다.

하노이대 연설에서 클린턴은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순 없어도 미래는 바꿀 수 있다" 는 감동적 연설로 양국의 협력관계 유지를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이 베트남에 저지른 잘못은 사과하지 않았다. 클린턴의 베트남 방문에 냉소적인 미국 내 보수세력을 배려한 것이다.

클린턴의 베트남 방문은 여러 면에서 역사적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베트남이 진정으로 역사적 화해를 이루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정우량. 국제담당 부국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