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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칼럼] 프랑스 문화원장이 남긴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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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행사 : 연간 1백70건 이상.

예산 : 전임자의 3배 이상.

1997년 부임해 4년의 임기를 마치고 다음달 15일 출국하는 피오렐라 피라스(59)주한 이탈리아 문화원장의 활동내역이다.

지난 87년 문을 연 이탈리아 문화원이 재정난을 견디지 못해 9년 만에 이탈리아 연구소와 영화관을 폐쇄하고 어학강좌마저 중단한 직후에 일궈낸 성과여서 더욱 놀랍다.

이런 피라스 원장에게 국내 오페라 단장들이 다음달 초 그간의 고마움을 담아 감사패를 전달한다고 한다.

성악가.지휘자 등 이탈리아의 좋은 음악가들을 국내에 많이 소개해주고 이들에 대한 항공료와 개런티 일부도 지원해 한국 오페라의 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뜻에서다.

비단 오페라계뿐일까. 피라스 원장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다치아 마라이니를 비롯해 화가.건축가.패션디자이너.요리연구가에 이르기까지 본국에서 검증된 사람만을 한국에 소개하는 철저함을 보였다.

나아가 독자적인 공연으로 문화적 우위를 뽐내려 들지 않고 한국인과 함께 하는 무대를 마련해 실질적인 문화교류가 되도록 배려했다.

오는 22, 24일 열리는 마리오 브로넬로 지휘의 이탈리아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은의 협연, 2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저명한 소프라노 아마릴리 니차와 나란히 서는 바리톤 이재환의 공연은 그 예다.

지난해 2월엔 정통 이탈리아 가정요리법을 담은 '맛으로 만나는 이탈리아' 를 발간해 한국어요리책을 펴낸 최초의 주한 외국문화원의 기록도 세웠다.

'부창부수(夫唱婦隨)' 일까. 3년 남은 정년도 마다하고 밀라노 대학교수(지질학)를 명예퇴직하고 아내를 좇아온 남편도 이 문화원의 요리강사로 나설 정도로 열심이었다.

이제 그녀는 아들처럼 기르는 늙은 페르시안 고양이 로차를 안고 2년간 외무부 본부근무를 위해 로마로 돌아간다. 떠나는 그녀를 두고 국내 문화계 인사들은 "남성 두세사람의 몫을 했다" 며 아쉬워한다.

우리나라의 해외문화홍보원은 79년 도쿄와 뉴욕에 첫선을 보인 이래 LA.파리.베이징.모스크바.워싱턴.오사카.베를린.오타와 등 열 곳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20년이 지나도록 여성 문화홍보원장은 배출하지 못했다.

피라스 주한 이탈리아 문화원장 처럼 열성적인 여성 문화홍보원장을 우리는 언제쯤 가질 수 있을까.

홍은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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