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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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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 여자들 얼굴에 숯 검댕 칠하고 다녀

그녀는 여러 가지 디자인과 재단 도해가 실린 두꺼운 일본 책을 여러 권 구해 가지고 있었다. 소련 점령군의 장교 부인들이 주요 고객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날마다 외출하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도 일을 찾지는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누나들과 함께 색종이로 여러 형상을 오리거나 접거나 하는 놀이며, 크레용으로 그림도 그리고, 그녀들이 소련군 군복의 흉내를 내어 내 상의에 넓적한 사각의 견장과 가슴에 색색의 훈장들을 은박지로 만들어 붙여 주면 으스대며 집 밖으로 나가곤 했다. 저녁 때가 되면 나는 누나들의 손을 잡고 전차 종점까지 나가서 어머니의 귀가를 기다렸다. 어떤 때에는 종점에 닿자마자 전차에서 내리는 어머니와 마주치게 되는 운 좋은 날도 있었고, 아니면 해가 완전히 저물어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차츰 무서워지는 그런 무렵까지 어머니가 나타나지 않아서 울음이 나온 적도 있다. 누나들도 울고 싶은 걸 참으면서 나를 달래는 척했다. 어머니가 귀가 길에 우리를 생각해서 사들고 오던 나마카시라고 부르던 양과자가 생각난다. 또는 시내에 즐비하던 중국집에서 만두나 호떡을 사 가지고 왔다.

아래층에는 소련군 장교 부부가 살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가 층계에 나타나기만 하면 언제나 달려와서 나를 안고 볼을 비비며 입을 맞추곤 했다. 그녀는 내게 시큼하게 절인 날 고등어나 호밀 빵을 먹였고 어머니는 질색했다. 해방 직후에는 소련군 병사들이 보드카에 취하면 민가로 쏟아져 나와 여자를 찾는 일이 종종 벌어졌기 때문에 젊은 여자들은 얼굴에 숯 검댕을 칠하거나 허름한 보자기를 쓰고 다녔다고 한다. 집집마다 놋대야가 있어서 밤에 술 취한 소련군 병사가 동네에 나타나면 집집마다 놋대야를 두드렸다. 병사는 시끄러운 소리에 겁을 먹고 달아났다는 것이다. 패전 후에 만주의 일본인 난민들은 한반도를 거쳐 남하하면서 그런 일을 수없이 겪었다고 했다. 어머니의 회상에 의하면 한 일본인 여성이 만주에서부터 두만강을 지나고 삼팔선을 넘어 부산을 통해 귀국하던 체험담을 '내가 넘은 삼팔선'이라는 책으로 내었는데 육이오 전에 한국에서도 번역이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에 의하면 그녀들은 조선 여자들과 달리 한번 무너지자 걷잡을 수 없었다고 했다. 예전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다.

나는 둥근 밥상 앞에 식구들이 모여 앉아 보리밥을 김에 싸먹던 생각이 난다. 북에서는 귀하던 김이 나와서 아이들은 모두 밥상을 두드리며 좋아했는데 정작 밥은 보리밥이어서 모두 안 먹겠다고 했다가 아버지에게 모두 혼이 났다. 정치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고 분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남북으로 분리된 두 개의 정부가 서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어머니는 우리 식구의 월남을 비정치적으로 표현하려고 언제나 '아버지의 직장을 찾아서 서울로 이사했다'고 말했다. 어느 날 밤에 우리는 간단한 짐을 꾸려 가지고 넷째 이모네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월남하겠다는 의사를 경숙이 큰언니나 막내 삼촌 같은 형제들에게는 발설도 하지 않았다. 이미 '사상'이 문제가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외가의 어머니 형제들은 이때에 헤어진 뒤 평생 죽을 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 나중에 우리 식구의 뒤를 따라서 셋째 경심 이모가 남편과 함께 월남했고 전쟁 중이던 일사후퇴 때에 경덕 큰삼촌이 내려온다. 막내 경석 삼촌은 나중에 인민군 장교가 되었다가 역시 큰이모처럼 전쟁 중에 죽었다고 한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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