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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에 끌려가기 싫으면 규칙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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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호 08면

드라마 39공부의 신39은 입시교육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적극 활용하는 파격을 구사한다. 삼류고교에서도 꼴찌인 다섯 아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한 특별반에서 공부하게 된다. [KBS]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를 한다-. 부모에게 이만한 ‘기적’이 어디 있으랴.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1년만 죽자 공부해서 서울대를 갈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내놓으려 할 것이다. 시청률 25%로 순항 중인 KBS 2TV 월화 드라마 ‘공부의 신’(윤경아 극본, 유현기 연출)에는 이런 부모와 아이의 판타지가 넘실댄다. 현실은 삼류 병문고 꼴찌지만 목표는 국립 명문대 ‘천하대’. 행복한 몽상이 부모와 자녀를 하나 되게 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 만만치 않다. 만화 같은 과장과 익살 사이사이에 현실이 녹아 있다.

‘공부의 신’ 변호사 주인공 강석호

한국 교육 현실 응축해 각색
‘공신’의 원작은 일본 만화 '드래곤 사쿠라'(한국 번역판 제목 '최강입시 전설, 꼴찌 동경대 가다')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변호사가 재정 위기의 삼류 고등학교 재건을 위해 명문대 특별반을 꾸린다. 기존 교사들은 입시교육 올인에 반대하지만 외부에서 영입한 교사들이 효과적인 공부 요령을 앞세워 주도권을 잡는다. 처음에 반발하던 아이들은 구체적인 동기와 목표 성취를 확인하며 공부의 재미를 깨우쳐간다. 2005년 일본 TBS에서 드라마로도 방영돼 인기를 끌었다. 파격적인 스토리 자체가 흡인력이 강하다.

'공부의 신'의 원작 자 미타 노리후사가 28일 내한해 기자회견을 했다. [연합뉴스]

‘공신’은 여기에 한국적인 상황을 끼워 넣어 각색했다. 원작 만화 속 도쿄대는 ‘천하대’라는 가상 명문대(사실은 서울대)로 치환된다. 강석호 변호사(김수로)는 병문고 꼴찌들에게 “찌질하게 불평만 늘어놓지 말고 천하대에 가라”고 한다. ‘일류대 못 가면 루저’라는 건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말만큼이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말이지만 그래도 엄마들은 환호한다. “드라마가 대신 현실을 깨우쳐주니 속이 시원하다”는 식이다.

‘특별반’ 캐릭터에는 한국 평균 10대들의 자화상이 담겼다. 가난 때문에 할머니와 함께 살 방 한 칸마저 뺏길 위기에 처한 황백현(유승호), 유흥업소를 운영하는 엄마 때문에 자신의 미래를 비관하는 길풀잎(고아성), 과학고 출신 똑똑한 형들에게 주눅 든 홍찬두(이현우) 등이다. 조손·한 부모 등 소위 ‘결손가정’과 자식 기대가 과한 상류층의 문제가 이들을 통해 투영된다. 그럼에도 끝끝내 가족애를 강조하는 건 지극히 한국적이다.

변호사 강석호(김수로)는 삼류고교 꼴찌들에게 “똑똑한 사람들이 만든 규칙에 속고 싶지 않으면 명문대에 가라”고 외친다. 드라마의 원작인 일본만화(작은 사진)는 국내에도 번역돼있다.

세세한 에피소드는 현실을 풍자한다. ‘똥통 학교 병문고’ 이전을 요구하는 주민들에게선 학군 따라 부동산값이 춤추는 현실이 보인다. 학교가 문 닫을 판인데 아이들 걱정은커녕 평생 직장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교사들은 어떤가. 자립형 사립고 전환, 지역균형선발의 편법 활용 등 교육 관련 이슈가 녹아있다.

씁쓸한 현실 풍자엔 학부모도 예외일 수 없다. 삼류고에 다니는 아들을 친구들 앞에 보여주길 꺼리는 찬두 아버지는 ‘엘리트 부모’의 이중성을 대변한다. 두 아이를 키운다는 한 네티즌은 “드라마 ‘강남 엄마 따라잡기’가 엄마들의 극성만 강조했다면, ‘공부의 신’은 모두가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교육 현실을 잘 보여준다”고 했다.
그러나 파격의 으뜸은 ‘공신’이 입시 교육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적극 활용하는 점이다. 이 점에서 ‘공신’은 전인교육의 이상을 호소해온 전통적인 학원물(‘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등)과 결별한다. ‘공신’만 해도 어정쩡한 줄타기로 시청자 눈치를 보지만, 원작 만화 '드래곤 사쿠라'는 단호하게 ‘현실론’을 주장한다.

만화가 잡지에 연재되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일본 사회에선 ‘유토리(여유) 교육’으로 학력이 저하됐다는 걱정이 커지는 시기였다. 유토리 교육이란 ‘주입식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학생의 창의력을 존중하고 문제 해답을 가르치기보다 해결 능력을 길러주는 걸 장려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하다 2002년 교과과정 개편으로 공교육에 본격 적용됐다.

하지만 이런 느슨한 교육은 ‘PISA 쇼크’를 가져왔다. PISA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00년 이후 3년마다 실시하고 있는 학업성취도 국제비교다. 첫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던 일본 고교생들의 수학 응용력은 2006년 조사에서 10위로 추락했다. 과학 응용과 독해력 역시 조사 때마다 뒷걸음질 쳤다. 유토리 교육에 따른 학습시간 부족이 원인으로 꼽혔다. 젊은 세대의 의욕 저하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일본의 경제학자 오마에 겐이치도'지식의 쇠퇴'에서 유토리 교육에 따른 일본의 집단IQ 저하를 우려하며 ‘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는 것’을 문제로 지적했다.

원작자 미타 노리후사는 만화 기획 때 유토리 교육을 의식했다고 했다. “학교를 무대로 무엇엔가 열중하고 성취하는 스토리를 그리려 했어요. ‘공부를 제대로 해보자’는 메시지를 던지려 하니 유토리 교육의 문제점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27일 내한 인터뷰)

만화에서 작가의 의견은 사쿠라기 변호사를 통해 대변된다. 그는 이상적 교육관을 주창하는 미야무라 교사 등에게 “최고의 교육은 원하는 대학에 진학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추억이 많은 재미 있는 학교를 만들자”는 데도 “청소년기에 필요한 것은 포만감이 아니라 기아감”이라고 응수한다. 주입식 교육에 대해서는 “최소 노력으로 최대 효율을 올리는 공부법”이라고 옹호한다.

아마도 가장 극적인 충돌은 류우잔 고교(‘공신’의 병문고에 해당) 교사들을 대상으로 재임용 시험을 치는 장면일 것이다. 교권 부정이라며 반발하던 교사들 중에 결과적으로 ‘통과 자격’을 갖춘 이는 아무도 없었다. 2007년 아베 정부가 교사의 질을 높이기 위해 면허갱신제도를 도입한 배경에도, ‘교육 개혁의 최대 걸림돌은 태만한 교사들’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공신’ 4회에도 재임용 시험이 나왔다. 교육계 쟁점인 ‘교원평가제’와 이에 저항하는 교단을 연상한 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교사의 권위는 ‘실력’에서 온다
교육권을 장악한 강석호의 일성은 수업 개혁이다. “병문고가 소위 똥통 학교의 불명예를 안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제대로 된 수업을 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그 누구도 참다운 공부를 한 게 아니었던 겁니다.”그런데 그 참다운 공부란 게 뭔가. 가령 ‘수학의 신’으로 불리는 차기봉 선생(변희봉)을 보자. 고1 수준도 못 갖춘 특별반 아이들에게 차기봉은 스피드 마스터의 비책이라며 ‘족집게 문제 50선’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고교 공통수학의 학습 목표를 철저히 반영해 분석했기 때문에 어떤 문제도 이 예상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심지어 시험 대비 시간이 부족하자 답과 문제를 나란히 놓고 풀이를 외우라고 지시한다. 물론 이걸 ‘참다운 공부’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긴가 민가 그를 따르며 수학 정복에 희망을 품는다. 학생들이 믿는 것은 그들의 리더가 ‘프로’라는 사실이다. 그 자신감·권위가 아이들을 공부로 이끈다.

그것은 기존 병문고 교사들이 갖지 못했던 미덕이다. 아이들 편에 선다며 결국 아이들에게 끌려 다닌 게 병문고의 지난날이다. 강석호는 백현이 중간고사에서 만점을 받으면 그 앞에 무릎이라도 꿇겠다고 한다. ‘오리지널 꼴통’이란 소리까지 들은 백현은 오기에 사로잡혀 공부에 덤빈다. 학생과 자존심 싸움을 해서라도 공부판에 끌어들이겠다는 열정, 그것이 특별반 교사들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멤버들의 무단 이탈을 이유로 전원에게 운동장 100바퀴를 시켜도 아이들은 따른다. 틈만 나면 조는 아이들에게 오리걸음·물구나무서기를 시켜도 아이들은 따른다. 이를 본 부모들이 경악하며 강석호의 멱살을 잡는 소동이 벌어진다. 하지만 백현의 할머니는 눈물 맺힌 채 돌아서며 “우리 손자는 이겨내야 한다”고 말한다. 물구나무서기 순간에도 아이들은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꾸로 선 교권은 그렇게 바로잡히는 것이다.

공부란 성장과 자유의 기회
도입부에서 강석호는 “이 세상에는 규칙이란 게 있고 똑똑한 놈들이 규칙을 만든다”고 외친다. “그들이 만든 규칙에 속고 싶지 않으면 천하대에 가라”는 것이다. 원작 만화 11권에선 한층 정제된 통찰이 나온다. “자유란 남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규칙대로 사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이에 따라 살아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룰에 불만이 있으면 룰을 만드는 사람이 돼라”는 강석호의 말은 이런 뜻에서 나왔다.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라는 콩도르세(18세기 프랑스 철학자·정치가)의 교육론과도 일면 만난다.

그런데 자신의 룰을 어떻게 만들 수 있나. 공부란 과연 무엇인가. 미타 노리후사는 이에 대해 “공부란 성장의 기회”라고 답했다. “지식을 주입시켜서 공부하는 과정 자체가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꼭 공부가 아니어도 목표를 세우고 열중하는 과정을 통해 사람은 성장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눈여겨볼 것은 교사들의 성장이다. 영어교사 한수정(배두나)이 대표적이다. 이상적 전인교육을 대변하는 그는 영어시험 경쟁에서 패배하면서 ‘가르치는 실력이 없으면 학생을 잃게 된다’는 것을 자각한다. 처음엔 양춘삼(이병준)의 암기법을 무시했지만 종래는 화장실에서 몰래 흉내 내본다. 이런 변화는 드라마가 중반부에 접어들수록 가속화될 것이다. 무기력하게 수업하던 교사들은 아이들의 변화에 놀라고, 이로부터 스스로 달라진다.

드라마는 학부모의 ‘성장’ 또한 기대한다. 8회에서 강석호는 부모들에게 “합격을 기대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합격에 대한 조바심을 내는 건 수험생과 교사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부모만이 이 세상에서 합격을 기대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자식이 오로지 최선을 다하기만을 기대하라”는 말이다. 많은 부모 시청자들의 콧날을 시큰하게 한 대목이다.

제작사인 드라마 하우스의 배익현 프로듀서는 “꼴찌란 삶의 목표 없이 무기력하게 있는 것”이라고 드라마의 정신을 요약했다. “당락이나 학벌, 공부 방법론이 중요한 게 아니다. 목표 지점에 닿고자 노력하는 누구라도 이미 꼴찌가 아니다. 아이들은 천하대 타이틀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것은 드라마 1회에 이미 나왔는지 모른다. 자장면 배달에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는 백현에게 강석호는 충고한다. “무슨 일을 하든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 드라마 ‘공부의 신’은 오늘날 학생·학부모·교사의 본분이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

<“공부 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를 참을 수 없는 자발적인 욕구와 앎의 필요를 느껴서 하는 공부다.”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중앙 펴냄)'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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