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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직업·종교·머리 색깔까지 맞아야 선택 받아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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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호 22면

전문 주례 한세용씨가 자신이 준비한 주례사를 연습하고 있다. 임현욱 기자

#30일 결혼식을 한 회사원 이모(28)씨는 25일 전문 주례 홈페이지를 열었다. 전문 주례 수십 명의 사진과 약력이 올라왔다. “일단은 엄숙해 보여야 하고, 선생님 출신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머리는 흰 것보다는 검은 머리가 좋고, 키도 좀 컸으면 좋겠는데….”

주례 전문인이 말하는 주례 풍속도

이씨는 학교를 졸업한 뒤 찾지 않다가 은사에게 불쑥 찾아가 주례를 부탁하기가 쑥스러웠다. 은사를 주례로 모시면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지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전문 주례에게 맡길 생각을 했다. 그는 “주례 없는 결혼식을 생각해봤지만 남들은 다 주례가 있는데 우리만 안 하자니 부담이 되더라”고 말했다.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과 약력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작성한 후기도 꼼꼼히 챙겨봤다. 결국 이씨는 교육장 출신 주례인 한세용(73)씨를 선택했다.

홈페이지에 주례 신청을 한 다음 날 한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씨는 의뢰인 이씨에게 기본적인 인적 사항과 특별히 원하는 스타일의 주례가 있는지 물었다. 이씨는 “지금까지 하시던 대로 해주시고, 짧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씨는 전문 주례에게 주례를 의뢰한 것을 부모님과 가까운 친척 외에는 알리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한테는 그냥 아는 선생님이라고만 소개했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먼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돈 주고 주례를 산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한세용씨는 25일 자신이 일하는 사단법인 한국주례전문인협회로부터 주례 의뢰가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씨는 다음 날 의뢰인 이씨와 통화를 한 후 주례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난해부터 전문 주례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주례사는 계절이나 날씨 이야기로 시작해 효도ㆍ건강ㆍ부부의 책임을 강조하며 마무리한다. 인천 영종도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30대 중반 학교에서 마을사람들의 결혼식을 올려줬는데 그때 처음 주례를 섰다. 이후 가끔 지인들의 주례를 본 적은 있지만 협회에 소속된 지난해만 40여 건의 주례를 봤다. 한씨는 “요즘은 절대로 주례사를 길게 하면 안 된다”며 “5분에 맞춰 준비한다”고 했다.

주례사를 100% 모두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90% 정도 준비한 뒤 현장 분위기에 맞춰 즉흥적으로 구성한다. 작성한 주례사는 거울을 보며 연습한다. 결혼식 아침에는 목욕탕과 이발소에 들른다. 한씨는 “당사자들한테는 평생에 한 번인데 내가 말 한마디 잘못해서 망치면 안 되므로 무척 긴장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주례를 선 날이면 집에 돌아오는 대로 바로 잠에 빠진다.

한씨가 소속된 한국주례전문인협회에는 70명의 전문 주례가 활동하고 있다. 2003년 출범한 협회는 결혼을 앞둔 신랑ㆍ신부와 전문 주례를 연결시켜준다. 은희권(78) 이사장은 “최근 몇 년 사이 전문 주례의 수요가 크게 늘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올바른 주례 문화를 전파하고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 협회를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협회에서는 주례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20시간의 교육을 받는데 혼례이론ㆍ화술ㆍ발성법ㆍ코디법ㆍ머리 손질법을 배운다. 현재까지 18기 1000여 명의 교육생을 배출했다.

교육을 마친 후에는 지필고사ㆍ실기시험ㆍ주례사 원고 쓰기 세 과목 시험을 보고 합격하면 협회 차원에서 주례인 자격을 주고 주례를 주선해 준다. 전문 주례로 활동하는 정태환(54)씨는 “신랑ㆍ신부가 요구하는 게 다양하다”며 “얼굴·키·나이·직업부터 종교나 머리 색깔까지 까다롭게 따져서 고른다”고 말했다. 대부분은 홈페이지에 들어와 직접 의뢰하지만 결혼 컨설팅업체나 예식장에서 의뢰가 오는 때도 있다.

사례비는 사람마다 다른데 일반적으로 10만~20만원 정도다. 주례 경력이 20년이라는 은 이사장은 “20년 전에는 주례사 길이가 보통 20~30분 정도였는데 요즘은 5분을 안 넘긴다”며 “요즘은 신랑ㆍ신부 집안이나 약력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별히 부탁해서 말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약력까지 다 말하기엔 시간도 모자라고, 과거에 비해 가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 주례인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지만 정작 주례를 의뢰한 신랑ㆍ신부는 주례를 전문 주례에게 의뢰한 것을 밝히기 꺼린다. 정태환씨는 “한번은 신부한테까지도 안 알리는 신랑도 있었다. 대부분은 그냥 아는 선생님으로 말해 달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이 볼 때 주례를 돈 주고 샀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주례 봐줄 사람도 없느냐는 식으로 바라볼까봐 조심하는 것 같다”고 했다. 주례인 최중원(70)씨는 “전문 주례는 이미 보편화됐다”며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활동하는 시대인데 결혼이란 예를 진행하기 위해선 우리 같은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협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례는 경찰서장 출신의 최성호(72)씨다. 지난해부터 전문 주례로 활동하는 그는 1996년 강서경찰서장 재직 시 북한 귀순자 주례를 본 이후 지금까지 300회가량 주례를 봤다. 깔끔한 외모와 현장에 맞춰 진행하는 주례사가 인기 비결이다. 그는 미국 시카고 영사관에 근무하며 연마한 영어 실력으로 한국인과 외국인 커플의 주례도 본다. 이때는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가며 말한다. 최씨는 “식이 끝난 후 고맙다는 전화를 받을 때 가장 보람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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