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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24) 맥아더의 통 큰 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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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1951년 3월 중순에 국군 1사단 사령부로 찾아 왔다. 지프에 앉은 맥아더 사령관(왼쪽)이 당시 1사단장이던 백선엽 장군과 악수를 하며 대화하고 있다. 그는 당시 71세의 고령이어서 웬만하면 차에서 내리기 싫어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국군 1사단이 서울을 재탈환한 뒤 사흘이 지난 1951년 3월 18일, 만리동 고개의 한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에 차린 사단 사령부로 큰 손님이 찾아 왔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다. 전쟁 기간 중 나는 그를 여러 차례 만났다. 한마디로 거물이다. 구사하는 전략의 단위가 평범한 장군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수퍼 히어로’다. 그 점은 나중에 서술하겠다.

미끄러져 들어오는 지프 앞에 맥아더가 앉아 있었다. 뒷좌석에는 매슈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과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 경제과학국장 마케트 소장이 타고 있었다. 앉은 채로 내 전황보고를 듣던 맥아더 장군이 별안간 “요즘 급식 상태는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당시 이미 71세의 고령이어서 웬만하면 차에서 내리기를 싫어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질문이었다. 뜬금이 없었던 내용이기도 했다. 나는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쌀 보급은 괜찮은 편인데, 채소와 사탕 등 감미품이 있으면 좋겠다”고 내가 대답했다. 맥아더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맥아더 장군이 떠나자 내 옆에 있던 사단 미군 수석고문관이 화를 냈다. “총사령관에게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냐. 더구나 급식 문제는 한국군이 처리해야 하는 사안 아닌가”라고 따지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먼저 꺼낸 말이 아니다. 총사령관이 묻기에 있는 그대로 대답한 것 아니냐. 그리고 미군들은 한국군을 도와주기 위해 온 것 아닌가”라고 역정을 냈다. 그도 달리 할 말이 없었던지 논쟁은 이어지지 않았다.

부끄러운 얘기다. 한국군은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전쟁을 치렀다. 지금이야 국방부에서 종합적으로 모든 물품을 구입해 체계적으로 식료품을 공급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대개는 보리와 쌀을 섞어 짓는 혼식이었다. 작전이 진행돼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익히는 데 오래 걸리는 보리를 빼고 쌀로만 밥을 짓는 경우가 더러 있을 정도였다. 된장과 고추장은 정부가 보내줬지만 다른 식료품들은 현지에서 때에 따라 구매하며 해결했다. 가축은 농가에서 눈에 띄는 대로 값을 치르고 샀다. 파와 마늘 등도 현지 사정을 보고 되는 대로 사들이는 식이었다. 김치라고 해 봐야 고춧가루와 양념이 제대로 들어간 건 보기 쉽지 않았고, 소금에 조금 절인 정도였다.

가끔 생선도 공급했다. 전쟁 통에 ‘삼천만의 영양식’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콩나물국이나 다른 채소국은 아주 가끔씩 식단에 올랐다. 지금의 군인 식탁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던 국민의 형편보다는 나았다.

미군들은 달랐다. A·B·C 세 등급의 레이션을 먹었다. A레이션은 스테이크를 포함한 제대로 갖춰진 양식이었다. B레이션은 소시지 등 가열해 먹을 수 있는 재료들로 채워져 있었고, C레이션은 통조림류로 휴대용 야전식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미군과 함께 일하는 한국인들에게 이 미군의 레이션은 인기 품목이었다. 미군에게 얻는 C레이션 한 박스를 시중에 내다 팔면 당시 돈으로 대개 1만원을 받았다. 그때 중령 월급이 3000원 했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맥아더 장군이 돌아간 뒤 일주일쯤 지났을까. 물자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내 말을 귀담아 들었던 맥아더 장군이 도쿄로 돌아가 지시를 내려 도착한 식료품들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이는 식량상자 안에는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들어 있었다. 김과 오징어·사탕을 비롯한 감미품 등이었다. 특별히 한국 군인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일본에서 만들어 보내 온 것이었다.

1사단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산 방향이었다. 서울 탈환 일주일쯤 지나 이기붕 당시 서울시장에게 서울을 반환한다는 내용의 의식(儀式)을 치른 직후였다. 작전명은 ‘토마호크(Tomahawk)’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정사단장과 군단장을 지냈던 리지웨이는 우선 공정대(空挺隊)를 적의 후방에 투하해 적의 퇴로를 끊어 이들을 분산시키는 작전을 구상했다.

이른바 ‘연계작전(link-up)’이 필요했다. 공정대는 헬기나 수송기로 이동해 낙하산 등으로 적의 후방에 투하된다. 적의 퇴로를 끊고 교량이나 진지 등 적들의 전략적인 거점을 장악하면서 유류(油類)나 식량 등 전쟁물자를 소각(燒却)하거나 없애지 못하도록 하는 작전이다. 그러나 반드시 지상군의 연계작전이 따라야 한다. 때에 맞추지 못하면 적의 후방에 떨어진 공정대가 몰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감한 공격의 개념이지만 위험이 크다. 섣불리 상대방을 공격하는 권투선수가 카운터 펀치를 맞는 식의 그런 위험이다.

6·25전쟁 중에 실시된 두 번째 연계작전이었다. 50년 10월 운산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대규모 미 공정대가 평안남도 숙천에 투하됐다. 당시에도 국군 1사단이 연계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했다. 그럼에도 미군의 우려는 컸다. 미군은 그들의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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