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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부머 K씨의 1년 실직일기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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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또 하나의 직업, ‘불량주부’

커버스토리 #50줄에 이꼴이 뭐냐 서럽고 억울…TV 보고 울고 “사원증 봅시다”에 주눅 도서관서도 쫓겨나고 아내 #없는 집에서 설거지·빨래 “인생 2차는 내가 쏜다” 결의

월간중앙 아내가 어학공부를 하러 외국으로 떠난 지 꼭 10개월이 됐다. 그동안 나는 우리 집 가사를 도맡아 ‘주부’로서 나름대로 활동했다.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면 한 75점 정도? 부끄럽다. 밥하기, 반찬 만들기, 설거지, 빨래하기·널기·개기 및 간단한 청소 등 흔히 주부들이 하는 일을 하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아래층 보일러실에 물이 샌다고 연락이 오면 수리인을 불러 해결해야 했다. 군 입대를 앞둔 아들이 잇몸이 퉁퉁 부어 식사를 하지 못해 친구 치과의사에게 연결해 주어야 했고, 부재 시 방문한 가스 검침원에게 전화 걸기, 경비실에 도착한 우편물이나 택배 물품 찾아오기 등 나의 몸은 여러 개로 쪼개 써야 했다.

하지만 반상회에 참석하라는 반장의 통보가 수 차례 있었지만, 진짜 가정주부들이 참석하는 그 자리에는 도저히 나갈 수 없었다. 무엇이든지 처음에는 낯설고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다. 한도 끝도 없는 주부의 역할을 하면서 점차 나는 가사에 적응돼 갔다. 그러나 끝내 어설픈 불량주부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어느 날엔가 아들이 쇠고기 장조림을 먹고 싶다고 해서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우선 딸아이한테 인터넷에서 조리법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 뒤 정육점에서 쇠고기 사태살을 사다 조리법에 따라 장조림을 만들었다. 그러나 잠시 돌아서서 설거지를 하다 그만 너무 졸이는 바람에 까맣게 태우고 말았다.

주방에 연기가 자욱할 정도였는데도 설거지에만 몰입한 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치매 초기 단계가 아닐까 하는 염려가 들 정도였다. 정성껏 만들어 아들에게 한껏 자랑을 하려고 했는데 어찌나 속이 상하든지…. ‘그냥 사서 먹는 게 남는 거예요’라던 주위 사람들의 조언이 떠올랐다. 하지만 오기가 발동한 나는 다시 시도하기로 했다.

원래 외식보다 집에서 먹는 것을 선호했기에 정성을 듬뿍 쏟아 아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싶었다. 며칠 후 전과 동일하게 조리법에 따라 조리한 작품이 완성되었다.

“아빠, 맛있어요.”

입맛이 꽤 까다로운 아들의 품평이 그 정도라면 일단 성공한 셈이었다. 밥그릇을 씻으면서 다시금 아이들을 생각해보는 시간, 그래서 먼 데 있어도 ‘침묵의 소리’가 이심전심으로 전달된다고 믿는 마음에 가족애는 차츰 커져갔다. 아내가 있을 때부터 시장 보는 일은 거의 내가 했지만, 이제는 주말마다 딸과 함께 또는 혼자 시장 보는 일이 즐거워졌다.

시장을 보는 노하우도 하나씩 쌓여갔다. 생선의 경우 휴장 전날 늦게 들르면 싸게 살 수 있다. 휴지·커피·음료·우유·요구르트 등은 보너스 상품이 하나라도 붙어 있는 것을 구입했다. 이쯤 되면 초보 가정주부는 넘었다는 자신감마저 들었다.

#4. 나의 건강 사수법, 심신수행!

아내가 집에 없으니 아침마다 아이들이 먹을 찌개 정도는 대충 챙겨놓아야 했다. 그렇게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했다. 돈을 버는 아버지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바에는 가사라도 제대로 함으로써 내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때로는 강박증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아내 대신 주부 역할에 충실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책임감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외출할 때 집에 남은 아이들과 소통은 쪽지를 이용했다. 예를 들어

‘1. 고추장 양념 돼지고기를 구워 먹어라. 타지 않도록 옆에 지켜서서 굽도록.
2. 밥이 모자라면 사놓은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2~3분 데워 먹어라.
3. 설거지는 가급적 해놓을 것.

PS. 그리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라. 해피데이! 아빠.’

뭐 이런 식이었다.
아내가 집에 있을 때는 아침 9시까지 도서관에 도착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 식사준비를 하다 보면 좀 늦어질 때가 다반사였다. 이 때부터 나는 수시로 아침을 굶었다. 밥맛도 없었지만, 몇 시간 후 국회도서관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면 되었다. 3500원짜리 백반으로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내 생활에서 등산도 빼놓을 수 없다. 등산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내가 등산을 좋아하는 것은 자연과의 합일을 느낀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등산을 하다 보니 자연히 건강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등산 마니아가 됐다. 등산은 육체적인 운동일 뿐 아니라 정신건강에도 좋은 효과를 주었다.

“가족 모두는 생불(살아있는 부처)이므로 혹시 가족 구성원 누군가 속을 썩이는 일이 있더라도 그를 향해 108배를 하면 반드시 복덕을 줄 것이다.”

누군가 속상하게 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절을, 그것도 108배를 하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말이 이상하게 생각되었으나 이제는 무슨 뜻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가량 밥이나 반찬·설거지·빨래 등 가족을 위한 일은 그 대상이 생불이므로 지극정성으로 해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이미 많은 가장이 가족을 위해 성심성의껏 살아온 것은 하심을 실행한 것과 다름이 아닐 터다. 그때부터 나는 하심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족 사랑이 최고

실직가장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족의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실 실직가장이 가장 크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아침에 일어나 갈 데가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또한 찾아주는 이가 없다는 사실에서 심한 고립감을 느끼면서 사회로부터 자칫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기도 한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가정에서 식솔끼리 격려하고 위로해주고 칭찬의 말을 들려주는 것에서 힘찬 원동력이 생기지 않을까? 남을 칭찬하면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사람의 본심은 착하기 때문에 자꾸 착한 쪽을 개발하고 자극하다 보면 자연히 좋아지게 마련이다.

어느 광고 카피에도 있는 말이지만 ‘행복도 전염된다’는 것이다. 그 옛날 사람 만나 술 마시는 분위기를 즐겼던 나는 실직기간에 가급적 약속을 하지 않은 채 단순하게 생활했다. 상대방에게 베풀 만한 주머니 사정이 안 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꾸 사람을 피하게 되었다. 실직 초기에는 외출했다가도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가려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은 새로운 환경을 만나면 처음에는 낯설어 하지만 점차 적응하면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갖게 마련이다. 특히 아내가 없는 내 처지에서는 일찍 들어가 해야 할 가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부엌 창 너머 저 멀리 아스라한 서쪽 산으로 넘어가는 석양은 너무나 감격스러운 풍경이었다.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며 사라지는 태양은 붉디붉은 노을을 선사하고 서서히 사라져갔다. 매일 반복되는 것이지만 석양을 볼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감흥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는 사이 나는 어느새 <가요무대><콘서트 7080><전국노래자랑> 등의 열렬 팬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진 질곡의 삶을 살면서 한 번이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남몰래 소리 없이 흘리는 눈물도 있을 것이며, 술 한 잔에 눈물을 담아 삼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특히 외로움을 많이 타는 갱년기의 퇴직자들은 울고 싶을 때가 더욱 많을 것이다. 어던 친구는 성인이 된 자녀들 앞에서 목놓아 울기를 여러 차례 했다고 고백했다.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고, 어깨가 무거웠던 가장은 체면을 불구하고 대성통곡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속이 시원해지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소리 내어 펑펑 울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TV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같은 프로그램을 보다 공감하는 부분이 나오거나 불쌍한 처지의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때가 종종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을 응원하고 나 또한 위로받는다. 감정이입을 통해 공감대가 형성되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5. 일과 돈

‘사흘 굶고 남의 집 담을 안 타고 넘는 사람 없더라.’ 예나 지금이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특히 어려운 서민일수록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6·25전쟁 후 불어난 베이비붐 세대인 나는 어렸을 때 주변에서 먹을거리가 거의 없어 허기진 배를 움켜쥔 이웃을 많이 봤다. 1960년대 초 국민소득은 60달러 수준으로 나이지리아와 비슷했다.

피란민이 밀집해 살던 서울 금호동 판자촌의 눈이 수북이 쌓인 미군 텐트 속에서 태어난 나는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지금까지 우리나라 격랑의 역사 속에서 50여 년을 살아왔다. 1960년대 초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미국의 원조로 받은 옥수수가루와 밀가루로 만든 빵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당시는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이 수두룩할 때였다. 그런 어린 시절 추억을 가진 나는 실직하자 가장 먼저 가난의 고통을 떠올렸다. 2008년 연말 퇴직 후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을 받았다. 그 가운데 일정액을 아내의 유학비용으로 쓰고, 그 나머지로 몇 달을 버텼다. 그런데 우리집 가계를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고정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고정수입이 끊기자 세 달 뒤부터 가계 재정이 여기저기서 펑크 나기 시작했다. 99만원의 실업급여가 들어왔지만 그것으로는 턱도 없이 모자랐다. 여유자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보험을 해약했다. 2년여 동안 낸 원금은 1000만원 조금 못 미쳤는데 중도해약하자 채 40만원도 안 되었다. 세상에 이런 날도둑이 있나.

월말이면 전기료·가스료·아파트관리비 등 공과금 납부와 카드사용내역서(연체 포함)까지 매월 해결해야 할 부채 명세서가 정신 없이 날아왔다. 우편함을 피하고 싶을 정도였다. 결국 연체가 한두 달 겹치면서 신용불량자가 됐다. 고이율의 이자장사를 하는 은행이나 카드사는 없는 사람에게는 저승사자처럼 무서운 존재였다.

길거리를 가다가도 은행이나 홍보간판이 보이면 외면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카드사용은 결국 외상을 하는 것이다. 사실 여러 장의 카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필요한 돈이 넉넉하지 않은 만큼 현금인출을 통한 돌려막기용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율의 이자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필요한 생필품 구입 등 생활비로 쓴 것도 있지만 은행대출 이자가 커다란 부담이었다.

몇 년 전 친척에게 집을 담보로 은행돈을 빌려주었는데 그 이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생활이 어려운 친척한테 채근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모든 것은 내가 짊어지고 가야 했다. 카드사로부터 현금 인출은 이율이 너무 높았지만 악덕 사채업자에게 손을 내밀다 가정파탄에 이르는 상황을 익히 알고 있던지라 하는 수 없이 손을 벌리게 되었다.

‘지옥이 따로 있나 이런 게 바로 생지옥이지. 언젠가 생활이 안정되면 신용카드를 모두 잘라버리리라.’ 나는 굳은 결심을 했다. 고정급을 받을 때는 입금 예정에 따라 최소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하다 보니 결국 카드 연체로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렸다. 금융권 신용등급조차 밑바닥을 쳤으므로 금융계에서 나의 신용은 엉망진창이 됐다.

재취업에 성공

그 후 늘 하던 것처럼 컴퓨터 모니터링을 통해 공기업 홍보전문가를 공채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어 서류를 접수했고 서류 합격통지와 더불어 면접 날짜까지 통보받았다. 면접 때의 일이었다.

“나이가 너무 많지 않나요?”

외부심사위원의 말이었다. 나는 이 소리를 듣자마자 핑계 김에 평소 가지고 있던 소신을 펼쳐나갔다.

“예, 흔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자연나이가 적다고 해도 현실안주적인 늙은 생각을 하면 나이가 많은 것이고, 비록 자연나이가 많다고 해도 젊고 활기찬 아이디어에 도전정신이 강하다면 늙었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고령화시대를 맞아 한창 일할 50대 나이에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픕니다. 저는 제가 응시분야에서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팔기 위해 왔습니다. 제 상품을 가지고 이야기하시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나는 이 같이 당당하게 답변하면서도 좀 켕기는 구석이 있었다. ‘너 이번에 떨어지면 또 고생해! 제발 그냥 면접관님의 비위가 상하지 않도록 완곡어법을 구사하라는 말이야. 아부는 못할지언정….’ 그러나 한번 터진 봇물은 막을 길이 없었다. 특히 사회가 나이 차별을 하는 것에 늘 불만을 가졌던 소회를 원 없이 풀고 나니 가슴이 후련했다.

당락의 문제는 그 다음 일이었다. 그러나 면접장을 나서자마자 후회가 몰려왔다. ‘곧으면 부러지는 법, 때로는 휠 줄도 알아야지. 지금 나이가 몇인데…. 철없는 짓을 저지른 거 아냐. 집에서 너만 쳐다보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니?’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시원하게 나의 소신을 밝혔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 나는 회사로부터 최종 통보를 받았다.

“축하합니다. 최종 합격했습니다. X일까지 인사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합격통지서를 받고도 나는 뜻밖에 담담했다. 그저 안도의 한숨을 크게 한 번 쉬었을 뿐이었다. 그 동안의 고통에 눌려 기쁜 감정이 채 폭발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쨌든 타는 목마름을 일단 해갈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나이에 내가 경험했던 분야의 일을 다시금 시작한다는 것과, 그런 노하우를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기분이 좋았다.

한편으로 나이를 따졌던 그 면접관은 정말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니 한 번쯤 다시 만나보고 싶어졌다. 면접관이 한 명이라도 낙제점수를 주면 다른 사람의 점수가 아무리 높아도 탈락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준비하는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나의 믿음은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지난 1년 동안 겪었던 별의 별 고생 경험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인생은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는 작은 조각배 같은 운명이다. 때로는 식인상어를 만나 필사의 탈출을 시도했다. 그 와중에도 따사로운 태양을 맞으며 평온한 남태평양의 파도를 타고 서핑을 하는 꿈도 꾸었다. 어쨌거나 일단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자 이제 또 다른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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