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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새 시대 맞는 북·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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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바둑에 다면기(多面棋)라는 것이 있다.

한 사람의 고수(高手)가 한꺼번에 여러 사람의 하수(下手)들을 상대로 하는 대국이다. 북한의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놀라운 집중력을 갖고 한.미.일을 상대로 바둑의 다면기 같은 게임을 벌이고 있다.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金위원장의 '대국상대' 는 하수들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유단자(有段者)들이라는 것이다.

金위원장은 연극보다 더 극적인 외교스타일로 미국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만나 빌 클린턴의 방북(訪北)에 필요한 조건들을 단숨에 타결해버렸다.

클린턴이 다음달 평양을 방문하면 북.미간 관계정상화와 평화체제에 관한 기본합의가 예상된다. 미사일과 테러지원국 명단 같은 문제들은 큰 합의의 용광로에서 녹아버릴 것이다.

북.일 수교교섭도 연내에 획기적인 진전을 보고, 내년초께 모리 요시로(森喜朗)총리의 평양방문이 실현될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북한이 이상한 나라에서 '보통국가' 로 가는 데 필요한 궤도를 까는 일이 끝난다.

큰 그림은 북한이 군사적인 모험주의를 포기하고 평화공존을 받아들이는 대신 한국과 미국이 북한체제의 안전을 보장하고, 국제사회가 북한의 경제회생을 지원하는 것이다.

북한이 수교의 조건으로 미국에 요구하는 것은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의 이름을 지우고 북한을 정상적인 나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야 북한이 해외에서 정상적인 외교활동을 할 수 있고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금융기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미국은 북한에 구체적인 반테러 조치와 장거리 미사일의 포기를 요구한다. 두 나라의 입장은 조명록(趙明祿)의 미국방문 때 상당히 접근했다.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이 매년 북한의 통신용 인공위성 두세 개를 대신 발사해줄 것을 기대한다.

비용만 갖고 보면 어렵지 않은 문제다. 한국이 과학위성 '아리랑1호' 를 발사하는데는 2천1백만달러가 들었다. 이런 수준으로 1년에 세개면 6천만달러 정도다.

더 어려운 문제는 북한의 주요 외화벌이 상품인 단거리 미사일 수출을 포기하는 대가로 3년간 해마다 10억달러씩을 배상하라는 요구다.

그러나 이 문제도 지난 몇년 동안의 수출실적을 기준으로 보상액을 산출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북한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역시 큰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로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고 외부세계로부터 경제.금융지원을 받는 길이 열린다면 북한은 세계여론의 지탄을 받는 미사일 수출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

金위원장은 클린턴을 맞아 남북 정상회담 때 이상으로 깜짝쇼를 연출하면서 북.미간 현안을 통크게 일괄타결할 것이다.

북.미수교와 평화체제가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문제는 11월의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부시 후보가 당선되는 경우다.

그러나 클린턴은 공화당 정부라고 해도 한반도 평화체제에 관한 합의는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평양에 갈 것이다.

북.미관계의 급진전은 우리가 바라던 일이다. 남북화해는 한반도 평화에 필요한 조건일 뿐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북.미관계가 정상화돼야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된다. 남북화해.협력과 북.미관계의 개선은 경쟁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조명록의 방미(訪美) 이후 북한이 남북관계의 진전에 성의를 덜 보인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몇 가지 사례도 있다.

그러나 북한이 통미봉남(通美封南)으로 돌아갔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북한도 남북관계 개선 없이 북.미관계 개선이 불가능함을 모를 리 없다.

중요한 것은 북.미관계 개선의 최종 단계에서 논의될 한반도 평화체제다. 그것은 남북한과 미국.중국의 4자합의의 틀 안에서 남북이 체결하는 평화협정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 그 방향의 한.미공조와 협의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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