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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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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제2차 기업구조조정의 앞날이 어두워졌다. 무성했던 소문대로 회생 가능성도 없는 부실기업을 퇴출시키기는커녕 구출하고 보자는 쪽으로 정책의 초점이 맞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현대건설은 올해 들어서만 세차례나 자구계획안을 주채권은행에 제출하고 채무상환 기간을 연장받아 간신히 하루 하루를 연명해 왔다.

그런데 지난 8월에 발표한 제3차 자구책 약속의 절반도 지키지 못한 채 미덥지 못한 내용의 제4차 자구계획을 제출하고 또다시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현대그룹의 입장에서는 다행일지 몰라도 한국 경제 전체로 보면 오히려 심히 걱정스런 일이다. 현대건설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한국 정부가 진정으로 기업구조조정을 단행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할 중요한 잣대가 돼버렸다.

그런데도 채권은행들과 그 배후에 있는 정부가 현대그룹에 계속해 끌려다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지 않은가.

이번 자구계획안이 마지막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현대건설 행태로 볼 때 제5차, 제6차 자구계획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때는 현대건설 문제가 단지 현대건설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1997년 당시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처럼 한국 경제 전체를 또다시 패닉 상황에 빠뜨릴 수도 있다.

진념 경제팀은 원칙없이 한보와 기아에 끌려다니다가 경제위기를 촉발시킨 강경식 경제팀의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 더 이상 현대건설에 끌려다니지 말라는 말이다.

한국 경제는 장기간의 구조조정 지연으로 심각한 신뢰위기에 빠졌다.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다.

하지만 말로만 구조조정을 추진하겠다고 해서는 시장의 신뢰가 회복되지 않는다. 적어도 더 이상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대기업 몇개쯤은 시장에서 퇴출되도록 하고, 은행 역시 부실은행 하나 정도는 완전히 문을 닫게 만들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국내외 시장 참여자들이 한국 정부의 구조조정에 대한 의지를 인정해 주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분명한 해결책이 있는데도 구조조정이 잘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미래지향적으로 이뤄져야 할 구조조정이 과거지향적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이란 과거의 부실을 정리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이상 부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체질을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밑 빠진 독의 수리는 뒷전으로 제쳐두고 그 독에 물을 퍼붓는 데에만 온 힘을 쏟아왔다.

오랫동안 기업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 은행은 한편으로는 정리(情理)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재벌기업의 몰락이 은행과 은행 경영진의 몰락을 초래할까 두려워 부실한 재벌기업을 퇴출시키는데 소극적이다.

이를 바로잡아야 할 정부도 막후에서는 온갖 간섭과 개입을 일삼으면서도 '금융자율화' 란 명분으로 나중에 어떤 형태로든 책임질지 모르는 구조조정에는 소극적이다.

하기는 오랫동안 현재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의 많은 부분에 대해 원인을 제공했으니, 적극적으로 문제를 풀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별로 없다. 밑 빠진 독에 부은 물이 다 빠져나가기 전에 정부가 앞장서 책임지고 엄정하고 신속하게 퇴출은행과 퇴출기업을 결정해야 한다.

물론 회생가능한 기업과 은행을 정상화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은 이 비상시기에 정부가 수행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그 대신 과거의 잘못은 덮어 주고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사소한 실책은 눈감아 주기로 하자. 더 이상 주저한다면 현 정부는 한국 경제에 영영 씻을 수 없는 원죄를 짓게 될 것이다.

이 가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부진한 구조조정을 놓고 "이제 개혁은 물건너갔다. 앞으로 한국 경제가 걸어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자조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경제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정운찬 <서울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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