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배명복의 세상읽기

미국, 이제는 일본의 손 놓아줄 때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오키나와의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을 둘러싼 미·일 갈등이 새해 들어서도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더 꼬여가는 양상이다. 2006년 합의한 주일미군 재편 계획에 따라 양국은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내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지난해 8월 총선으로 집권한 일본의 민주당 정부가 선거 공약이란 이유로 이전 계획의 전면 재검토를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미국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는 5월 말까지 해결책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그제 있었던 오키나와 지방선거에서 이전 반대파가 승리함으로써 대안 마련은 더욱 어려워졌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은 미국에 철저하게 순종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그 탓에 종속국가란 소리까지 들어 왔다. 그랬던 일본이 미국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미국으로서는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지난 50여 년간 일본을 지배해온 자민당 정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일본은 중국에 대해서는 잇따라 추파를 던지고 있다. 집권 후 하토야마 총리가 개별국가로 처음 방문한 나라는 중국이었다. 민주당 실세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간사장은 143명의 국회의원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알현’케 했다. 중국의 유력한 차기 지도자인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이 일본을 방문하자 의전상 관례를 무시하고 아키히토 천황과의 면담을 주선하기도 했다. 하토야마 총리가 난징(南京)을 방문, 1937년 난징 대학살에 대해 사죄하고, 후진타오 주석은 히로시마에서 평화 의지를 선언함으로써 중·일 화해의 역사적 이벤트를 연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란 얘기도 들린다.

미국의 쇠퇴와 중국의 부상으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질서가 재편되면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탈구입아(脫歐入亞)’와 ‘탈미입중(脫美入中)’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중국은 이미 일본의 최대 교역국이다. 연간 교역액이 3000억 달러에 육박한다. 중국의 22개 도시와 일본의 18개 도시를 연결하는 정규 항공편만 주당 635편에 이르고, 연간 500만 명 이상이 양국을 왕래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 갈등을 바라보는 미국 내 시각은 엇갈린다. 하나는 절대 미국이 양보할 수 없는 문제라는 보수파의 시각이다.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는 “반미(反美) 좀 하면 어때” 하는 객기로 미국에 대들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하토야마 총리에게 충고한다. 반면 조셉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후텐마 기지 때문에 50년 미·일동맹이 훼손되는 것은 미국의 손해라는 입장이다.

일러스트=강일구 ilgoo@joongang.co.kr

2차대전의 승리로 패권적 지위를 획득한 미국은 유럽과 일본을 자유 진영의 대표선수로 애지중지 키웠다. 냉전 종식과 함께 미국 품에서 벗어나 분가(分家)한 유럽은 유럽연합(EU)이란 이름으로 일가(一家)를 이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제 몫을 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라는 동맹의 끈은 유지하고 있지만 성격은 글로벌 동맹으로 바뀌었다. 반면 몸은 어른이 됐는데도 여전히 부모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자신의 처지를 답답하게 느낄 것이다. 한국도 미국의 뜻대로 잘 자라줬지만 북한 문제 때문에 아직 부모 품을 떠나기는 이르다. 노 전 대통령의 홀로서기 시도는 사춘기 소녀의 반항이었다.

존 아이켄베리 프린스턴대 교수와 찰스 쿱찬 조지타운대 교수는 얼마 전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미·일동맹을 유지한다는 전제 하에 일본의 대중(對中) 접근을 허용함으로써 중국과 일본이 동아시아 통합의 쌍두마차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EU의 틀에 묶인 통일독일이 프랑스와 함께 유럽 통합의 양 축 노릇을 했듯이 ‘차이팬(Chipan)’이 동아시아 공동체의 중심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중국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편입·안착시키는 방법이며, 미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의 이익에도 부합한다는 시각이다.

혼기를 놓친 노처녀 딸의 히스테리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책은 적당한 배필을 골라 출가(出嫁)시키거나 혼자 살 수 있도록 분가를 허용하는 것이다. 미국은 일본의 손을 놓아주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어떤 형태로든 동맹관계는 유지하되 일본이 ‘보통국가’로서 보다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도록 ‘재량권(free hand)’을 허용할 시기가 됐다. 어차피 중국과 일본은 정체성과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동맹이 될 수는 없다. 과년한 딸의 신경질을 받아주면서 계속 품 안에 품고 있는 것보다는 홀로 서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부모 슬하를 떠난다고 유대가 끊어지는 것도 아니다. 일본의 보호자에서 동반자로, 미국은 역할 변화를 모색할 때가 됐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