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기고 판세를 먼저 읽어라.중국적 사고엔 치밀한 계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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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가 오려니 바람이 먼저 누각에 가득 찬다’는 시구를 형상화한 그림이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비, 그에 앞서 미리 닥친 바람을 그렸다. 중국인들은 바람과 비, 풍우(風雨)를 변화와 위기의 뜻으로 읽는다.

‘산에서 비 몰아치려 하니 바람이 먼저 누각에 가득하다(山雨欲來風滿樓)’
당(唐) 나라 시인 허혼(許渾)의 시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그 앞의 구절은 ‘골짜기에 구름 일고 해는 지니(溪雲初起日沈閣)’다. 구름(雲), 해(日), 비(雨), 바람(風)이 병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시점상의 관계는 구름이 일고 해가 지면서 비를 품은 바람이 닥쳐오는 순서다. 진시황(秦始皇)이 천하의 패권을 자랑하던 함양(咸陽)의 동쪽 성곽에 있는 한 누각에 올라 해가 뉘엿뉘엿 지는 풍경과 함께 자신의 소회를 읊은 내용이다.

그 점과는 상관없이 맨 앞에 인용한 ‘산에서 비 몰아치려 하니…’라는 구절은 천하의 명구로 자리 잡고 있다. 비에 앞서 누각에 가득 차들어 오는 바람의 기세가 매우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다. 고기압과 저기압의 불안정한 기압 차이로 대기는 늘 움직인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움직이는 대기는 이런 이동을 통해 나름대로의 평형을 이룬다. 공기가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의 결과가 바람이다. 바람은 불고, 그를 맞는 물체는 움직인다. 옷감은 바람을 맞아 펄럭이고, 나뭇가지는 그 공기의 변화에 따라 흔들린다. 거센 바람이라면 사람도 걸음걸이에 영향을 받는다. 앞으로 나아가기조차 힘든 바람이 몰아칠 때도 있다.

바람만 닥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는 때가 많다. 사물을 들썩거리게 하고, 쨍쨍한 태양이 갑자기 먹구름에 가려 천지를 어둡게 만드는 게 바람과 비다. 바람은 변화를 몰고 오는 전령이다. 게다가 그 뒤에 비까지 닥치니 평화롭던 날씨는 바람이 몰아치는 순간에 다양한 변화의 길목에 들어서게 마련이다. 바람과 비, 그래서 풍우(風雨)다.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일상적인 한자(漢字) 세계에서 이 풍우는 간곡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담는다. 그것은 변화의 전조(前兆)이자, 닥쳐오는 위험을 뜻한다.

앞에서 인용한 시의 구절은 원래 경치를 묘사한 단순한 서경(敍景)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인의 마음속에 새겨진 이 구절의 뜻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먼저 등장하는 계곡의 구름, 잠기는 해, 닥쳐오려는 산비(山雨), 누각에 가득 차는 바람의 시간적 병렬이 뭔가를 잔뜩 암시하는 분위기다. 바람 앞에 서는 것은 변화의 모든 조짐 앞에 나서는 것이다. 그 바람과 비는 어떤 결과를 몰고 올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바람과 비가 몰고 오는 변화는 물론 좋은 것일 수도 있다. 오랜 가뭄의 끝이라면 비는 반가운 대상이다. 그러나 거센 바람과 함께 몰아 닥치는 비는 그 반대다.

상징적인 비유지만, 맑은 날씨는 늘 좋은 이미지다. 그에 비해 먹구름과 바람, 비는 그 반대의 이미지다. 정상적인 하늘은 맑고 갠 상태고, 그 반대의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 들어차 바람과 비가 닥치는 상태다. 따라서 바람과 비는 어둡고 긍정적이지 않은 이미지다. 알 수 없는 미래와 그 안에 담겨 있을지도 모를 위기의 신호다. 그래서 바람의 정면에 먼저 나서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일지 모른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바람 머리(風頭)’를 경계한다. 앞으로 나서기 좋아하는 것은 ‘아이추펑터우(愛出風頭)’다. 늘 남들보다 먼저 앞에 나서서 제가 가진 실력을 뽐내거나 남 앞에 드러내는 자세를 일컫는다. 제가 속으로 지닌 것을 숨기지 않고 모두 까발리는 행위도 이에 해당한다.

칼과 창의 끝은 예리하다. 그러나 미리 내보이는 칼과 창의 끝은 상대의 깊은 경계심만 자아낸다. 상대의 방어가 미리 견고해지면 자신이 거꾸로 몰릴 수가 있다. 그 위험한 상태를 나타내는 성어가 ‘봉망필로(鋒芒畢露)’다. 칼과 창의 예리한 끝(芒)이 주저 없이 다 드러나는 상태다. 중국인들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상황이다. 깊은 그림자 속에 제 자신을 숨겨야 한다는 충고가 앞에서 언급했던 도광양회(韜光養晦)다. 그 반대가 제 칼끝을 모조리 드러내는 행위다. 중국인들은 이렇게 남 앞에 먼저 자신의 속내와 실력 등을 드러내는 행위에 결코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마치 제 맘에 맞지 않는 세상을 등지고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숨는 은자(隱者)의 사고를 닮았다. 먼저 감추기를 좋아하고 드러내기를 싫어한다. 커다란 지혜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아야 한다는 ‘대지약우(大智若愚)’의 참언(讖言)적인 충고도 그렇다. 정말 뛰어난 것은 오히려 서툴러 보인다는 뜻의 ‘대교약졸(大巧若拙)’, 깊이 숨겨 둔 채 내보이지 말라는 뜻의 ‘심장불로(深藏不露)’도 같은 맥락이다.

한결같이 먼저 자신의 속내와 실력 등을 드러내면서 자랑을 하는 사람에 대한 경계의 뜻을 담고 있다. 바람 앞에 결코 서지 않으려는 노력, 그것은 중국인의 정신 세계에 모종의 각성(覺醒)으로 다가온다. 가능하다면 제 자신을 꼭꼭 숨겨야 한다. 나를 숨긴 뒤에 바람이 몰고 온 변화를 새로 읽어야 한다. 그 변화의 기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 어떤 행동으로 이 변화를 내가 유리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것인지…. 이를 먼저 따져야 한다. 행동과 발언은 그 다음이다. 상황을 보고 그에 적응하거나, 때로는 그것을 역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많은 ‘셈(打算)’은 시작된다. 중국인들이 하나의 행동에 열 가지 생각을 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다 이 계산성 때문이다. 그것은 중국인의 행위와 사고에 널찍하면서도 깊은 회색지대를 형성한다. 이도 저도 아니면서, 뭔가 크게 담고 있는 듯한 그레이존(Grey Zon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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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국제부·정치부·사회부 기자를 거쳐 2002년부터 5년 동안 베이징 특파원을 역임한 중국통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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