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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차례 7년3개월간 옥고 치른 안재홍 “민족은 죽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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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안재홍(1891~1965)이 신간회 총무간사 시절 좌파 문인 홍명희(왼쪽)와 함께 현충사를 참배한 후 찍은 사진(민세 안재홍 기념사업회 소장). 그때 그는 홍명희의 대표작 『임꺽정』의 신문 연재를 도왔다.

1928년 1월 25일 조선일보 발행인 안재홍은 다시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사흘 전 이관구가 쓴 ‘보석(保釋) 지연의 희생’이라는 사설이 빌미였다. 야만적 고문으로 악명을 날린 고등계 형사 사이가 시치로가 남긴 수사기록이 잘 말해주듯, 1919년에서 1942년 사이 무려 9차례 투옥되어 7년3개월의 옥고를 달게 치른 그는 일제에 눈에 박힌 가시였다. “일한병합 당시부터 조선독립을 몽상하고 이를 위해 일생을 희생으로 바치겠다는 각오하에 실행운동을 계속하여온 자로서 조선민족주의자 간에는 절대 신용을 갖고 널리 내외주의자 사이에 알려져 있는 자”이며, “조선에서 비합법적인 활동이 곤란하기 때문에 신문에 원고 투고, 팸플릿 발행 혹은 강연, 좌담회 등의 방법으로 민족주의를 선전 선동함으로써 조선민족 독립의 필연성을 고취하여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자발적인 독립운동을 하도록 상시 집요하게 불온언동을 일삼는 악당이다.” 천관우의 기억 속 그는 “평균 10일에 7편꼴의 사설과 시평을 집필하는 경이적인 정력으로” 종횡무진 저항의 필봉을 휘두른 당대 최고의 논객이었다.

일제에 대한 타협 여부를 기준으로 지식인들을 좌우로 나눈 그였기에, 신간회(1927~1931)의 총무간사로 이상재 등 민족진영 원로와 함께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과 손을 맞잡고 일제에 맞서 싸웠다. “세계문화를 채취하고 적용하는 긴장된 도정에서 어떻게 조선색(朝鮮色)과 조선소(朝鮮素)를 그 수용의 주체로 확립할 것인가?” 문화와 역사를 지키면 민족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는 신간회 해산 이후 ‘황민화’를 내걸고 동화정책을 펼치는 일제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강령과 정책에 맹종해 민족문화와 전통을 경시하는 사회주의자들에 맞서 조선학 연구의 선봉을 자임했다.

‘오늘날 20세기 상반기에 가장 온건 타당한 각 국민 각 민족의 태도는 민족에서 세계로, 세계에서 민족으로 교호되고 조제되는 일종의 민세(民世)주의를 형성하는 상세(狀勢)이다’(‘조선학의 문제’·『신조선』1934년 12월호). 그때 그는 오늘의 열린 민족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민세주의’ 즉 국제적 민족주의를 제기한 비타협 민족주의자였다. 광복을 맞아 민세주의는 ‘신민족주의’로 진화했다. 그때 그는 민주주의의 전제인 의회제도를 바탕으로 공공선의 실천체로서 국가가 대지주와 자본가가 사회의 부를 독점하는 모순을 미리 막아 민중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려 한 득중(得中)의 길을 걸었다. ‘균등사회의 경제적 토대 위에 대중적 정치 평등의 체제를 수립’하려 한 그의 혜안과 선각이 새삼 빛나는 오늘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