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 지키던 중국, 연합국 도왔지만 돌아온 건 배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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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호 33면

프랑스 후방의 군수공장에서 프랑스인 부녀자들과 일하고 있는 중국인 노동자들. 김명호 제공

1914년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막이 올랐다. 제국주의의 고통을 맛보았던 중국인들은 “열강들끼리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졌다며 재미있어 했다. 중국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전쟁 같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49>

위안스카이 정부는 하늘이 준 기회라며 쾌재를 불렀다. 서구 열강과 대등한 관계로 국제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량치차오는 신속한 전황 파악을 정부에 주문했다. 헌정신문사 통신원 자격으로 러시아와 독일을 둘러보고 온 장쥔리(張君勵)는 독일의 패망을 예언했다. “서구 열강과 체결했던 불평등조약을 수정하려면 참전을 서둘러야 한다. 국제사회에서는 힘이 정의라는 것을 중국 청년들은 알아야 한다. 용기와 실력을 갖추지 못한 국가는 존중받지 못한다”며 참전을 촉구했다.

연합국의 일원인 일본은 개전과 동시에 칭다오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군을 몰아내고 산둥반도를 차지했다. 중국의 참전을 기를 쓰고 반대했다. 영국과 프랑스도 일본 편을 들었다. 북양 정부는 중립을 선포했다.

‘이공대병지책(以工代兵之策)’의 제창자 량스이.

량스이(梁士<8BD2>)는 대총통 위안스카이의 심복이었다. 북양 정부 최대의 파벌 ‘교통계(交通系)’의 영수로 정부 재정을 한 손에 움켜쥔 ‘재신(財神)’이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있었고 무슨 일이건 독특한 견해를 피력하곤 했다. 권모술수에도 능했던지 중국에 와 있던 서방세계의 외교관들은 ‘중국의 마키아벨리’라며 혀를 내둘렀다. 교활함과 총명함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민첩하고 배포도 컸다. 그가 부장으로 있던 교통1부는 외교에 관한 권한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상인과 정치가와 외교관을 합쳐놓은 인물이었다.

량스이는 전쟁 초기부터 적극적인 참전론자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청년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배워 올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정론가를 자처하던 책상물림들을 한 차례 훈계한 후 ‘이공대병지책(以工代兵之策)’을 제시했다. “연합국과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어야 한다. 중립을 선포했지만 실제로는 국제질서를 존중하고 연합국에 가입하기를 갈망한다는 메시지가 필요하다. 군대를 대신해 노동자를 파견하면 성의와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들도 우리가 중립선언을 백지화했다고 비난할 이유가 없다. 참전은 여유가 있다.” 지인들에게도 “전쟁은 파티와 같다. 끝이 있게 마련이다. 이 전쟁에서 독일은 절대 이길 수 없다. 이길 가능성이 있는 곳에 붙어야 전후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2년이 지나자 참전국들의 손실은 엄청났다. 하루 평균 6046명이 전쟁터에서 죽어나갔다. 특히 프랑스는 16세에서 49세까지의 남성 중 13.3%가 목숨을 잃었다. 노동력 결핍에 시달렸다. 프랑스와 영국은 중국에 손을 내밀었다. 농민으로 구성된 14만 명의 노동자들이 프랑스로 건너갔다. 2만여 명이 현지에서 희생됐고 3000여 명은 중도에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1918년 11월 4년을 끌던 전쟁이 끝났다. 이듬해 1월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미국·영국·프랑스의 삼거두는 독일의 조차지였던 산둥반도를 일본에 할양하기로 합의했다.

대국의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사회에서 사람 대접을 받으려 했던 중국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완전한 사기’라며 중국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5월 4일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갔고 중국은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2년 후 중국공산당이 탄생했다. 노동자들의 유럽 파견이 없었더라면 중국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치욕을 당했을 일도 없고 5·4운동도 일어날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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