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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정치자금 혐의자 넘겨 달라” 한국 검찰에 요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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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호 08면

도쿄지검 검찰청사 정문 앞. 이곳에 위치한 도쿄지검 특수부는 일본 정가의 실력자인 민주당 오자와 간사장의 정치자금 수수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이다. [중앙포토]

지난 17일 오후 3시 서울 서초구 법조타운의 서울고등법원 403호 법정. 고법 형사20부 소속 판사 3명이 입정하자 일본인 이름이 호명됐다. 법정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일본인 나카무라 히데오(中村秀夫·52)였다. 한국 법정에 선 일본인은 긴장과 함께 약간 얼이 빠진 듯했다. 그가 피고인석에 섰다. ‘범죄인인도 심사재판’이 시작됐다. 나카무라는 한국어를 하지 못해 법원 소속 통역관의 도움을 받았다.

지난해 11월 도쿄지검 특수부 검사가 서울 찾은 까닭

▶재판장=“이름이 나카무라 히데오 맞습니까?”
▶나카무라=“하이(네).”
▶재판장=“직업은 공인회계사고요?”
▶나카무라=“하이(네).”
▶재판장=“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됐죠?”
▶나카무라=“2009년 7월 검찰에서 수사에 나선 걸 알고 한국으로 입국했습니다.”
▶재판장=“피고인은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에 의해 범죄인인도가 요청돼 한국 검찰에 체포됐습니다. 일본국으로 신병이 인도되는 데 동의하나요?”
▶나카무라=“하이(네).”

재판부는 그에게 자필 일본송환 동의서를 작성, 제출케 했다. 동의서를 받은 후 검찰석에 나와 있던 서울고검 공판부의 임상길 부장검사가 나카무라에게 물었다.

“피고인이 일본에서 어떤 죄를 저질렀기에 도쿄지검의 범죄인인도 요청 대상이 됐나요?”
“저의 혐의에 대해서는 일본 검찰에 가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나카무라의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심사 재판은 10여 분 만에 끝났다. 현재 서울구치소의 독방에 수감 중인 나카무라는 판결 선고가 나는 대로 절차를 거쳐 일본으로 송환된다. 시기는 2월 초순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 검찰, 첫 범죄인 인도 요청
이날 법정에 한국 기자는 여기자 한 명을 제외하곤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 주재 일본 신문과 방송국 기자들이 여럿 보였다. 후지TV 서울특파원인 야마구치 요시히로(山口吉博)는 서둘러 재판 결과를 휴대전화로 본사에 보고했다. 통화가 끝난 후 일본 언론이 나카무라 사건에 왜 이리 관심이 많은지를 물었다. 그는 “나카무라가 엄청난 액수의 세금을 빼돌렸는데 그 돈이 일본 정계에 정치자금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카무라는 법인세 16억 엔(약 200억원)을 내지 않은 혐의를 받고 있다. 일본 정부의 범죄인긴급인도 구속영장에는 ‘2007년 5월~2008년 4월 유가증권투자사를 운영하면서 소득을 누락하거나 허위로 손실이 났다고 보고하는 방법으로 세금을 빼돌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나카무라는 도쿄지검 특수부의 수사를 받던 지난해 7월 중순 한국으로 도피했다. 일본 법무성은 외무성을 통해 우리나라 법무부에 긴급인도구속을 청구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범죄인인도 조약을 체결한 24개국 중 하나다. 한·일 간에는 2002년 범죄인인도 조약이 체결, 발효됐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일본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한국으로 도피한 15명을 체포해 그들 나라로 보냈다. 15명 가운데 나카무라는 일본 검찰이 인도 청구한 첫 사례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나카무라의 검거에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서울중앙지검 외사부와 총무부, 수사지원팀이 나섰지만 도피 4개월이 지나도록 소재 파악이 되지 않았다. 다급해진 일본 검찰은 지난해 11월 초 나카무라의 소재 파악을 위해 공식적으로 형사사법공조를 요청했다. 수사검사인 야마우치를 직접 한국에 보내 사안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12월 8일 나카무라는 대구시 만촌1동에서 대구지검 수사관들에 의해 검거됐다. 이후 나카무라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됐고 이날 심사 재판을 받은 것이다.

일본 검찰을 대표해 2007년 7월 한국에 파견된 구마다 아키히데(熊田彰英) 검사도 법정에 나와 재판을 지켜봤다. 구마다 검사는 일본 검사로서 한국에 파견된 첫 법무협력관이다. 그에게 나카무라가 현재 도쿄지검 특수부가 수사 중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민주당 간사장에 대한 수사와 관련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오자와 간사장과 나카무라 사건 수사를 도쿄지검 특수부가 하고 있긴 하지만 담당 부서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나카무라가 정치자금 조달 창구였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사건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일본 언론의 관심이 지대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나카무라는 직접 투자회사를 운영한 공인회계사다. 그래서 누군가의 정치자금을 맡아서 관리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나카무라의 수사 결과에 따라 일본 정계는 다시 한번 불법 정치자금 폭풍에 휘말릴 수 있는 상황이다.

일본 측은 나카무라의 체포에 고마움을 표했다. 특히 지난 7일 방한한 지바 게이코(千葉景子) 일본 법무상도 나카무라의 인도 절차가 진행 중인 것에 대해 여러 차례 고마움을 표시했다. 여성 인권변호사 출신인 지바 법무상은 지난해 9월 하토야마 총리에 의해 임명됐다.

하토야마 총리 위장 기재 혐의도 수사
나카무라에 대해 범죄인인도를 요청한 도쿄지검 특수부. 이곳은 현재 오자와 민주당 간사장의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집중 수사 중이다. 검찰은 지난 5일 오자와 간사장에게 출두를 요청했지만 불응했다. 이에 검찰은 13일 정치자금 관리단체인 리쿠잔카이(陸山會) 사무소와 이시카와 도모히로(石川知裕·36) 중의원의 의원회관 사무실 등 5곳을 압수수색했다. 15, 16일엔 이시카와 의원 등 오자와 간사장 측근 3명을 체포했다. 도쿄지검은 이미 오자와 간사장의 지역구인 이와테(岩手)현 댐 건설공사를 둘러싸고 건설업체인 가지마(鹿島)건설이 이시카와 의원에게 1억 엔을 전달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검찰의 정치수사에 대해 결사 항전하겠다”던 오자와 간사장은 결국 23일 검찰에 출두했다. ‘선거의 신’으로 불리는 오자와 간사장과 ‘수사의 신’으로 통하는 도쿄지검 특수부가 일전을 벌였다.

특히 오자와 간사장은 자민당에 있을 때 1976년 록히드 사건으로 구속됐던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92년 택배회사인 도쿄사가와규빈 사건에 연루됐던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이듬해 구속)로부터 정치를 배웠다고 한다. 오자와 간사장이 이미 도쿄지검 특수부에 의해 사법처리가 된 두 정치 거물과 운명을 같이 할지도 관전 포인트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지난해 말엔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갔었다. 오자와 간사장의 뒤를 이어 민주당 대표를 맡아 8·30 총선을 승리로 이끈 뒤 총리가 된 그였다. 하지만 취임 1개월 만에 정치헌금 위장기재 문제가 불거지자 검찰은 주저 없이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의 칼날은 정치자금 수수 의혹으로 옮겨갔다. 결국 하토야마 총리가 200억 엔대 자산가인 어머니 하토야마 야스코(타이어 메이커인 브리지스톤 대주주)로부터 5년간 10억 엔의 돈을 받아온 사실을 밝혀냈다. 가족 간의 거래라 사임은 하지 않았지만 증여세 5억 엔을 내야 한다.

10년째 일본 국민이 가장 신뢰하는 기관
도쿄지검 특수부는 지난해까지 10년 연속 ‘일본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기관 1위’에 올랐다. 일본 법무협력관을 지낸 노명선 성균관대 교수는 “도쿄지검 특수부의 명성은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며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엄정 수사의 전통이 비결”이라고 말했다. 구마다 검사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초임 검사 때부터 검찰청 분위기와 선배들의 전통과 역사, 발자취로부터 수사에 성역이 없음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 검사들은 가장 존경하는 선배 검사로 가와이 신타로(河井信太郞)를 꼽는다. 도쿄지검 특수부장을 지낸 그는 특수 수사 노하우와 수사철학을 집대성한 『검찰독본』을 썼다. 일본 검찰사에서 정·관계 수뢰사건 수사에서 이름을 떨쳐 ‘특수수사의 신’으로 불린다. 회계 경리 실력이 탁월해 경제사범 수사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다. 미 군정하이던 1948년 세 번째 내각 붕괴 사건인 ‘쇼와덴코(昭和電工)’ 사건 수사에서 핵심 역할을 했고, 54년 네 번째(요시다) 내각 붕괴로 귀결된 ‘조선의옥(造船疑獄)’ 사건에선 주임검사였다. 이때 집권당의 두 거물이었던 이케다 하야토와 사토 에이사쿠(둘 다 나중에 총리 지냄)의 구속을 추진하기도 했다.

“범죄 수사에 의해 내각이 붕괴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사실을 추궁하고 증거를 수집해 수사를 진행한 결과가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검찰이 수사를 흐지부지함으로써 발생하는 폐해는 내각 붕괴로 인한 것보다 크다.” 가와이의 저서 『검찰독본』에 나오는 말이다.

일본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상실한 적도 있다. 92년 가네마루 신 부총재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조사 때 직접 조사 대신 서면진술서만 받고 벌금형으로 처벌해 국민의 비난을 샀다. 하지만 이듬해 가네마루를 체포, 구속하면서 명예를 회복했다고 한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1947년 창설됐다. 사회적 파급력이 큰 대형부패사건과 경제사건 수사를 전담한다. 한
국 검찰과 달리 특수부장 아래 3명의 부부장검사가 있고 그 밑에 10명 안팎의 수사검사가 배치된다. 각 부의 부부장검사가 대형 사건의 주임검사로서 검사들을 지휘한다. 특수부 검사는 40명이고 검찰 수사관은 90여 명이다. 가와이 검사의 전통을 이어받아 70년대 들어 당대 최고 실세들의 부패 스캔들을 수사하면서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 76년 록히드 사건수사, 89년 리크루트 사건 수사(다케시타 노보루 내각 총사), 93년 도쿄사가와규빈 사건 수사 등이 유명하다. 도쿄대 법대 출신이 많다.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지키는 정치검찰이라는 비판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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