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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도에서 오슬로까지 김대중대통령 인생역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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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내용은 한반도 평화와 인권쪽의 우리 현대사를 압축한 것입니다. "

평화상 수상 가능성이 가장 컸던 1987년 독일 사민당 의원들이 金대통령을 처음 추천했을 당시 현지에 있었던 민주당 한화갑(韓和甲)최고위원은 이렇게 감격 섞인 회고를 했다.

민주화 투쟁과 남북화해 협력을 위한 그의 인생 역정(歷程)엔 험난한 시련이 있었다. 납치와 사형선고 등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간의 수형과 55번의 연금(軟禁), 10년의 해외망명이 있었다.

그가 받은 국제인권상은 그런 삶들을 평가.기록하고 있다.

"투옥과 암살 위협에 굴하지 않고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에 헌신해 왔다" (99년.미국 필라델피아 자유메달),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의 역할, 남북 화해정책으로 북한 사회의 인권 개선에 기여했다" (2000년.노르웨이 라프토인권상).

그밖에도 金대통령은 브루노 케리스키 인권상(81년), 미국 조지미니 인권상(87년), 유엔인권협회 인권상(98년)을 받았다.

◇ 좌절과 재기〓1924년 1월 6일(호적 1925년 12월 3일) 전남 하의도에서 태어난 그는 고교(목포상업) 졸업 뒤 일본인이 운영하던 목포상선에 취직했다. 해방 후 22세에 회사 관리인으로 뽑혀 목포일보까지 경영하는 수완을 보였다.

6.25와 자유당 독재를 지켜본 그는 "정치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는 신념을 갖고 현실정치에 뛰어들었다.

정치권 진입은 쉽지 않았다.

그가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은 61년 5월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 그나마 사흘 만에 5.16 쿠데타로 등원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54년 총선 때 목포, 4.5대 총선에서는 인제에서 출마해 내리 떨어졌다.

3전(顚)4기(起) - . 좌절과 실패를 성공의 디딤돌로 전환시키려는 그의 집념이 만들어낸 재기의 첫 사례다. 민주화 투쟁에서 인동초(忍冬草)의 이미지는 이때 그 면모를 드러냈다.

62년 5월 평생동지인 이희호(李姬鎬)여사를 만난 뒤 이듬해 제6대 총선 때 목포에서 당선되면서 그는 정치적으로 급성장했다.

정치쟁점을 선점한 국회활동을 발판으로 그는 야당 대통령 후보가 돼 71년 박정희(朴正熙)대통령과 맞붙었다. 남북문제를 새로운 정책 이슈로 내걸어 국민적 관심을 끌었다. 4대국 교차승인론.남북한 교류추진.예비군 폐지 등 집권세력에 충격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DJ의 3단계 통일론' 의 기초는 이때 다져졌다.

73년 8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벌어진 납치사건으로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상징적 인물로 국제사회에 투영됐다. 그는 민주회복국민회의(74년)에 참여하고 3.1구국선언(76년)을 주도했다.

79년 10.26으로 '서울의 봄' 이 왔으나 신군부의 5.17 쿠데타는 그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내란음모사건' 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광주학살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발은 구명운동으로 이어졌고, 노르웨이.스웨덴에까지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감형 뒤 그는 82년 10월 미국으로 갔고 85년 2월 12대 총선을 며칠 앞두고 귀국했다. 미국 국회의원들이 수행하고, 타임지 표지까지 장식할 정도로 그의 귀국은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

그 후 민추협 공동의장인 YS(金泳三 전 대통령)와 함께 5공 권력을 몰아붙였고 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그해 야당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고, 다시 좌절했다.

88년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재기했으나 92년 14대 대선에서 YS에게 졌다. 바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2년을 보낸 그는 아태평화재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95년 정치권으로 다시 돌아왔다.

◇ 햇볕정책〓97년 12월 대선에서 그의 승리는 헌정사상 첫 여야 정권교체로 기록됐다. 네번째 도전 끝의 성공이었다. 취임초기 경제 살리기에 전력을 쏟아 1년반 만에 IMF 졸업을 선언했다.

인권상황을 개선하는 데도 주력했다. 보안법 위반자 사면.사형수 감형 등이 이어졌다.

서해교전사태(99년 6월)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다듬어온 3단계 통일론에 따라 '햇볕정책' 을 밀고 갔다. 대북 식량지원과 금강산 관광이 이뤄졌다.

그는 지난 6월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포옹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논란 속에 단행한 비전향 장기수의 북송은 인권중시의 이미지를 보태줬다.

그의 평양 방문과 그 이후 이어진 눈물의 이산가족 상봉은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지구상에 남아있는 마지막 냉전의 벽' 을 허물었다는 국제적 평판을 받았다.

김진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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