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 라이프] '버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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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난 주말 서울 노량진역 근처의 한 버스정류장. 젊은이 다섯 명이 64-1번 버스를 기다리며 서있다.

같은 노선 버스 몇 대를 일부러 보낸 뒤 약간 초조해하던 이들은 저 멀리서 RB520 모델 버스가 달려오자 쏜살같이 달려가 차에 올랐다.

RB모델이 곧 폐차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마지막 시승을 위해 모인 이들은 '버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버사모)' 의 골수 회원들.

이들은 지난해 8월 '버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이란 홈페이지(http://www.freechal.com/buslove)를 열고 각 PC통신 상에 흩어져 있던 버스 매니아들을 불러모았다.

'버사모' 에는 "버스 손잡이만 잡아보면 엔진상태를 알 수 있다" 는 차량전문가부터 서울시내 3백60여개 버스 노선을 줄줄이 외는 어린 학생까지 1백여 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홈페이지 살림을 도맡은 조영준(趙英俊.30)씨는 인터넷 벤처회사에 다니는 신세대. "버스천국에 사는데 자가용이 왜 필요한가" 라고 외칠 정도로 버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목적지에 갈 때에도 도시형 버스부터 고급좌석까지 서너번씩 갈아탄다는 趙씨는 한달 버스비가 30만~40만원씩이나 들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분당에 사는 고교생 김영준(金永峻.17.송림고1년)군은 방과후엔 서울로 외출을 한다. 학교앞에서 서울행 직행좌석을 탄 뒤, 광화문에 내려 도시형 버스를 갈아타고 시내를 한바퀴 돌아본다. 그냥 버스타는 게 좋아 시작한 취미가 이젠 하루를 마감하는 일과가 됐다.

"출입문 바로 앞자리인 '로얄석' 에 앉는 날이면 차량을 살펴보기도 수월하고 기사 아저씨와 얘기도 맘껏 할 수 있어 너무 좋다" 는 金군은 이런 극성 덕분에 지난해 8월 범일운수의 명예사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방안에 연예인 사진 대신 버스노선도를 붙여놓고 폐타이어.핸들.손잡이를 전시해 놓을 정도. 한달에 한번씩 정기모임, 일주일에 서너번 씩 번개모임을 갖는 버사모의 활약에 요즘은 버스회사도 긴장하고 있다.

올해초부터 회원들이 버스 시승일지를 만들어 인터넷 홈페이지에 꾸준히 올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버스번호.운행구간.배차간격.친절도.청결상태 등을 빼곡하게 적어넣은 시승일지는 버스의 질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 정도.

버사모 회원들은 시내 가판대에서 파는 서울시내 버스노선책자가 현실과 너무 맞지 않는다며 인터넷에 새 노선도를 만들어 올리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서비스가 불친절하다고 생각하면 우선 전화를 걸어 시정을 요구하고 너무 심하다 싶으면 집단 항의 방문도 서슴지 않는다.

한번은 성남의 모 운수업체가 한가한 노선의 차량을 인기노선에다 불법 증차하는 것을 적발, 찾아가 항의시위를 벌인 적도 있다.

버스가 지하철보다 좋은 이유 - .

"주변풍경 볼 수 있죠, 갈아타기 편하죠, 심심하면 기사아저씨와 얘기할 수 있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다리품 팔 일 없고... 또 뭐가 있더라. "

버사모 회원들의 버스 예찬은 계속됐다.

박지영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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