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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도 큰 재산인데 나라에선 그걸 몰라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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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호 08면

1 어룡 화석. 중국. 중생대에 가장 잘 적응한 수중 생물 ‘어룡’의 화석. 가로 2m가 넘는다.2 거미 화석. 골격이 연한 거미가 화석으로 남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3 한국산 땅거미. 김주필 박사가 2004년 박물관 인근 산에서 채집한 신종 땅거미. 보통의 한국 거미는 한해살이지만, 땅거미는 5년을 산다.

“아줌마! 거미 한 마리 튀겨야겠어.”
첫마디부터 심상찮았다. 거미박물관 김주필(67) 관장이 취재진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박물관 구내식당 아주머니에게 건넨 말이다. 예상치도 않았던 거미튀김을 먹어야 하나, 살짝 긴장한 순간 다음 말이 이어진다. “스펀지에서 촬영 온대. 캄보디아 가면 식용 거미를 먹잖아요.”

이경희 기자의 수집가 이야기 - 주필거미박물관 김주필 관장

김 관장의 별명은 ‘거미 박사’다. 동국대 석좌교수인 그를 빼놓고는 국내의 거미 연구를 논하기 어려울 정도다. 거미 연구의 대부가 된 데에는 수집이 한몫했다. 박물관에서 보유한 거미 표본만 5000여 종 22만 개체다. 생물학 연구자에게 표본만큼 든든한 연구 자산은 없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박물관을 연 것은 2004년이다. 거미박물관이라지만 거미만 있는 게 아니다. 광물·곤충·동물·화석 2000여 종을 포함해 총 30만 마리에 달하는 표본이 있다. 거미를 방사해 키우는 수목원 ‘아라크노피아(arachnopia)’를 포함해 6만6000㎡에 달한다.

“생물 유전자 전쟁이 중요해요. GMO를 비롯해 앞으로 점점 형질 변형된 개체가 많이 나올 거예요. 오리지널 유전자를 잘 보관하면 국가적으로 큰 재산이 됩니다. 우리나라가 아직 그걸 모르죠.” 호박 속에 갇힌 중생대 모기의 피에서 공룡 DNA를 추출해 공룡을 만들어낸 영화 ‘쥬라기 공원’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일 수 있다. 모든 생물의 유전자는 신약 개발을 비롯해 수많은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찰스 다윈이 150년 전 해군 군함을 타고 갈라파고스를 조사했잖아요. 월남전 때도 미국은 군인이 가는 곳엔 반드시 생물학자가 극비리에 따라가도록 했고요. 고려 때도 문익점이 목화씨를 몰래 훔쳐올 정도로 중국에서 유전자를 보호했던 거 아닙니까. 우리나라도 국가 차원에서 생물학자를 보내 표본을 구해야 해요.”

‘유전자 전쟁’이다. 각국에선 학자의 채집에 대해서도 매우 까다롭게 규제한다. “최근 베트남에 다녀왔는데, 여권을 맡겨두고 채집을 하라더군요.” 그렇다고 조용히 허가받은 거미만 가져온 건 아니다. “혁대 쪽이 가려운 거야. 희한하게도 나무에서 떨어져 내려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가 있더라고요. 다 뜯어서 표본으로 잡아왔지.”
박물관은 언뜻 보기엔 허술해 보이지만 속의 내용물을 보면 입이 벌어진다. 거미 중 가장 덩치가 크다는 육식 거미 타란튤라는 죽은 놈부터 산 놈까지 버글버글하고, 나비 표본은 물론 실핀으로 하나하나 꽂은 모기 표본까지 별의별 곤충에 해충이 다 있다.

그뿐 아니다. 공룡 화석 등 각종 화석, 거대한 종유석들, 장수거북 표본에 기린 박제 등 동물 표본, 수석도 즐비하다. 귀하고 비싸기로 유명한 규화목도 여러 점이다. 개인이 모은 것이라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다. 더 놀라운 건 현재 가치가 아닌, 구입가 기준으로만 300억원에 달하는 박물관 전체를 동국대에 기증한 것이다. 교수가 무슨 돈이 있어서.

“서울대 생물학과를 졸업했어요. 그런데 1960년대 초의 한국은 비참했어요. 외무고시 봐서 외국으로 튀어야겠다 생각하곤 외교학과로 학사편입을 했죠. 반기문이 내 동기야. 백양사에 들어가 한참 공부하는데 6개월 만에 외무고시 제도가 없어진 거예요.”

스님이 관두고 서울로 가랬다. 그에겐 관운이 없고 재운이 있다는 거였다. 뭘 가지고 돈을 벌어야 하나. 고민하다 표준전과 시리즈 생물편을 썼다. 참고서가 히트 치면서 학원강사로 스카우트됐다. 한 달에 집 한 채 값을 벌었다. “강사가 집 한 채면 원장은 얼마나 벌겠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학원 하나를 인수했죠. 그러나 오래 할 일은 아니다 싶었어요. 돈이 내 인생의 목표는 아니니까. 학창 시절의 흔적을 헤집다 보니 그때 설계한 인생 플랜이 있더라고. 다시 그 방향으로 가야겠다 마음먹었어요.”
10~15년 후배들이 대학 교수직에 앉아 있는 모교에 돌아가긴 멋쩍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동국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은 건 그래서다. 42세에 박사가 됐다.

“환경에 제일 좋은 동물이 첫째는 지렁이, 둘째는 거미예요. 그런데 지렁이를 조사하려고 청계천에 갔더니 메탄 가스에 질식해 죽겠더라고. 죽으면서까지 연구할 필요는 없잖아요. 어차피 시작할 거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상, 거미로 바꿔 열심히 한 거죠.”
열정이 있는 데다 재력이 뒷받침되니 두려울 게 없었다. 사업가적 기질 덕에 박물관도 흑자 운영이다.

“박물관 뒤쪽이 동국대 땅이에요. 그 넓은 땅을 놀리면 뭐 합니까. 박물관을 기증하면서 세계적인 생태 공원을 만들라고 했죠. 대학이 등록금으로 유지하면 안 돼요. 사업해서 돈을 벌어 베풀어야 일류 대학이 되는 거지. 나는 ‘주필거미박물관’으로 내 이름 두 자만 남기면 된다고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더 많은 정보를 원하시면 블로그 ‘돌쇠공주 문화 다이어리(blog.joins.com/zang2ya)’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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