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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영섭 전 대법원장] 격변기 사법부 이끈 원칙주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대법원장으로 재임했던 시절은 회한과 오욕의 나날이었습니다. "

11일 별세한 이영섭(李英燮)전 대법원장이 1981년 4월 '사법부(府)' 를 일개 부처인 '사법부(部)' 로 비유해가며 던진 이 한마디의 퇴임사는 우회적이지만 정치군인들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으로,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는 사법부에 대한 비통함의 토로로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膾炙)됐다.

고인의 생애는 영욕이 교차했다. 그는 법관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대법관을 20년가까이 역임한 최장수 대법관이다.

아울러 한국 민사소송법의 태두(泰斗)로 꼽히는 저명한 법학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최고의 영광인 대법원장에 임명된 뒤에 닥친 시련은 한몸으로 감당키 어려운 것이었다.

유신말기에서 10.26, 12.12로 이어지는 어수선한 정국에서 실권을 잡은 신군부는 끊임없이 그를 압박했다.

당시 전두환(全斗煥)보안사령관은 고인의 자택을 방문해 김재규(金載圭)씨 사건을 조속히 처리해 주도록 종용했다.

하지만 그는 소극적이었고, 그 결과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재임 25개월만에 중도하차했다. 고인의 손녀 강은경(姜銀卿.30)씨는 "할아버지는 신군부의 외압에 시달리면서 안면에 경련이 일어나 입이 어긋났을 정도로 심하게 가슴앓이를 했다" 고 회고했다.

하지만 퇴임후엔 다시 평온하고 소박한 삶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판사시절 '도시락 판사' 로 불리우곤 했다.

"판사가 접대를 받으면 소신껏 재판을 할 수 없다 "는 이유에서다.

퇴임후 변호사를 개업한 李전대법원장은 역시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후배 판사들에게 부담이 될 순 없다" 며 상고심 사건만 수임했다.

유족으로는 기승(基勝.외환은행 조달청지점장).기형(基亨.사업).기향(基香.한성대 교수)씨 등 2남 3녀가 있다. 강철구(姜哲求)광주고등법원장이 사위다.

발인은 13일 오전 9시. 장지는 경기도 양주군 한산리 선영. 02-3410-6915.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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