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같은 기업 놓고도 퇴출심사 엇갈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금융감독원의 부실징후 기업 판정작업 담당자는 지난 주말 시중은행들이 들고온 자료를 보고 기가 막혔다.

심사대상을 뽑아보라고 했더니 한빛은행 2백개, 조흥은행과 신한은행 1백여개 등 대부분 시중은행들이 1백개가 넘는 기업명단을 들고왔기 때문. 중복된 것을 감안해도 5백개가 넘어 보였다.

금감원은 할 수 없이 각 은행이 자체적으로 관리해온 업체는 은행이 알아서 하고, 여러 은행이 함께 심사해야할 업체만 엄선해보라며 교통정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은행간에 미묘한 입장 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담보를 확보한 은행은 가능한 퇴출 쪽에 무게를 싣고, 신용대출을 많이 해준 은행은 살리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

하지만 이같은 이해관계를 조정할 장치가 전혀 없어 앞으로 퇴출여부 판정이나 자금지원에 은행간 협조를 이끌어내기가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 심사대상 선정부터 혼선〓금감원의 기준이 애매하자 각 은행이 자체적으로 관리해온 기업까지 모두 대상에 올려 심사대상이 크게 늘었다. 게다가 주채권은행이 분명치 않은 기업도 많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은행들이 각자 심사대상을 정할 경우 중복이 생길 수 있다" 며 "금감원이 취합해 교통정리를 해줘야 일이 빨리 진행될 수 있다" 고 말했다.

세부기준도 은행마다 차이가 있다. 서울은행은 과거 3년간 결손을 냈는지 여부를 가장 중요시하는 데 비해 우량은행들은 현금 흐름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식이다.

한빛은행 관계자는 "현재의 재무상태뿐만 아니라 기업의 미래가치까지 평가해야 하는데, 이런 기준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며 "세부기준이 은행별로 너무 차이가 나면 곤란하므로 조율이 필요하다" 고 지적했다.

은행들은 이번 주말까지 구체적인 심사기준과 평가위원 명단, 최종 심사대상기업을 정해 금융감독원에 제출하고 다음주부터는 본격심사에 착수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심사 기준조차 확정하지 못한 은행들이 있어 일정대로 진행될지는 의문이다.

한 은행관계자는 "이달내로 심사를 끝내기는 어렵다" 면서 "당국이 시한내 심사를 요구한다면 졸속심사가 이뤄질 우려도 있다" 고 말했다.

◇ 엇갈리는 은행간 이해관계〓담보가 있느냐에 따라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담보를 많이 확보한 우량은행들은 느긋한 편이다. 되도록 기준을 엄격히 정해 확실히 살 수 있는 기업만 지원하자는 입장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신용대출을 많이 해준 공적자금 지원 은행들은 가능한한 많은 기업을 살리자는 쪽이다.

조흥은행 관계자는 "우리는 과거 정부의 산업정책에 호응해 신용대출을 많이 해줬다" 며 "신용대출을 장려해온 정부가 이제 와선 담보대출을 주로 한 은행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데 대해 팔짱만 끼고 있으니 답답하다" 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업대출이 많지 않은 한 우량은행 간부는 "기업대출을 하면 이익이 많이 난다는 걸 알면서도 안한 이유는 위험관리 때문이었다" 며 "이같은 은행정책을 무시한 무조건적인 지원요구는 부당하다" 고 지적했다.

◇ 이해관계 조율장치가 없다〓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의 경우 금융기관들이 지켜야 할 협약이 있다.

이 때문에 채권액 기준으로 75%가 살리자고 결정하거나 자금지원을 결의하면 나머지 은행은 싫어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위약금을 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심사과정이나 심사 후 자금지원 과정에선 이같은 강제규정이 전혀 없다. 따라서 은행간에 평가가 엇갈릴 경우 이를 어떻게 조정할지가 막막한 상태다.

서울은행 관계자는 "채권은행간 협의회를 구성하긴 하겠지만 협의회가 강제력을 행사할 수 없어 주채권은행의 평가결과를 나머지 채권단이 따라주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우여곡절끝에 살려주자는 결론이 나도 막상 자금지원 단계에선 모두가 비협조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커 이를 조율할 기구가 필요하다" 고 지적했다.

정경민.정철근.김원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