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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핵주권을 말할 때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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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한국 원자력연구소의 과학자들은 2000년 초 몰래 원자 증기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AVALIS) 방식으로 우라늄 농축 실험을 세 번 했다. 실험에서 얻은 0.2g의 우라늄의 순도는 평균 10%, 최고 77%였다. 2004년 9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이 사건을 이사회에 보고할 준비를 했다. 한국 정부는 사무총장 3선을 위한 운동을 하고 있던 엘바라데이에게 그 사건을 IAEA 이사회에 회부하면 그의 3선을 좌절시키는 운동을 벌이겠다고 협박했다. 엘바라데이는 한국 정부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사건을 이사회에 보고했고, 한국 정부는 일부 과학자들이 학문적 호기심에서 그런 실험을 했다고 해명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을 결심한 것은 1972년이다. 한국은 1973년 프랑스에 핵연료 재처리 시설과 실험용 원자로를 주문했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과 프랑스에 압력을 넣었다. 한국과 프랑스는 재처리 시설 거래를 포기했다. 한국은 1980년대에도 인산염(phosphate)에서 우라늄 산화물(UO2)을 추출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평화적으로는 원자력 발전과 의학에 이용되고 군사적으로는 핵무기 제조에 이용되는 핵에 대한 미련의 극단적인 모습이 핵주권론이다. 보수우파에서 많이 나오는 핵주권론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이 언제 걷힐지 모르니 한국은 자체적인 핵·미사일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게 요지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는 더욱 그렇다. 온건한 핵주권론자라도 주권 국가의 프라이드를 위해서 핵 능력은 갖춰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1972년에 체결되고 1974년에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이 2014년에 만료되기 전에 개정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려는 지금 핵주권론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핵주권론자들은 일차적으로 한국이 핵연료의 재처리 시설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이 갖고 있는 20개의 원자로에서 나온 사용후 연료의 저장 능력이 2016년까지는 포화 상태에 이른다는 전망이 그들의 말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핵무기 개발을 염두에 둔 핵연료 재처리는 말할 것도 없고, 사용후 핵연료를 재활용하는 핵연료 사이클의 완성을 위해서 재처리 시설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으로서는 잃는 것은 백이요 얻는 것 제로인 발상이다. 구체적인 이유를 보자.

미국은 한국이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갖겠다고 하면 대뜸 한국의 속셈이 핵무기 개발에 있다고 의심한다. 1970년대 이래 우리의 핵 관련 전과가 누적된 탓이다.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라서 미국의 기술로 지은 원자로에서 나온 사용후 연료는 모양과 내용물을 바꾸려면, 구체적으로는 재처리를 하려면 미국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을 신뢰하지 않고, 1974년 이후 세계적인 분위기가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 기술의 확산을 통제하는 쪽으로 바뀌어 한국에 재처리를 허용하는 내용의 합의는 미국 의회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 그럴 리 없지만 지금의 협정이 개정되지 않고 2014년에 기한이 끝나버리면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수주한 200억 달러 원전도 수출할 수 없고 국내의 원전도 가동하지 못하는 극단적인 사태를 맞게 된다.

북핵도 심각한 걸림돌이다. 6자회담 참가국들과 한국은 북한에 핵을 포기하라고 압박한다. 9·19 공동성명의 합의 중에서 가장 핵심 되는 것이 북한의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의 중단이다. 북한에는 핵을 포기하라면서 한국은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갖는 것을 누구보다도 미국이 반대할 것이다. 재처리 시설은 경제적으로도 어리석다. 시설 하나 짓는 데 100억 달러 이상이 든다. 수입 우라늄을 쓰면 연간 몇억 달러로 족하다. 그래서 일본도 재처리 시설을 갖고도 수입 우라늄에 의존한다. 순도 높은 플루토늄을 생산하지 않는 파이로 프로세싱 방식이면 미국이 동의할 것이라는 생각은 현실을 모르는 희망 사항이다. 미국의 주류 과학자들은 파이로 프로세싱도 탈(脫)플루토늄이 아니라고 경계한다.

핵주권론은 손해나는 규범론이요 공허한 포퓰리즘이다. 재처리 시설을 가지면 국가적 자존심은 조금 만족될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외교적으로 잃는 것이 너무 많다. 핵주권론은 애국에서 나와도 결과는 해국이 된다. 한·미 원자력협정은 공론화 없이 조용한 협상으로 지금 수준에서 연장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핵주권은 북핵이 해결되고 경제적으로 타산이 맞을 때 요구해도 늦지 않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