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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장 ‘편향 논란’ 언급 없이 “사법부 사수” 받아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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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20일 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회의에서 의견을 말하고 있다. 안 대표는 이 회의에 앞서 열린 사법제도개선특위에서 “좌편향·불공정 사법 사태를 초래한 이용훈 대법원장이 입장을 밝히고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안성식 기자]

이용훈 대법원장이 20일 ‘사법부 독립’을 강조하며 그동안의 침묵을 깼다. 그는 지난주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에 대한 무죄 판결을 둘러싼 논란이 촉발된 뒤 입장 표명을 자제해왔다.

이날 발언은 “우리 법원은 사법부 독립을 굳건히 지켜낼 것”이란 짧은 한마디뿐이었다. 하지만 ‘굳건히’ ‘지켜낼 것’ 등 단어를 보면 그가 작심하고 입을 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출근길에 기자들이 “법원 판결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고 하자 이같이 답했다. ‘사법부 수장으로서 외부의 압력에 영향받지 않고 원칙에 따라 대응하겠다’는 결의가 엿보인다. 이 대법원장의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를 볼 필요가 있다.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상대방이 있기 때문이다. 법원의 한 간부는 “국민을 향한 것”이라고 했다. “국민들이 헌법상 보장된 법원의 독립성이 크게 흔들리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국민들께 안심하라는 뜻을 전한 것”이란 얘기다.

구체적으로는 여권을 향한 경고 메시지란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 부장 판사는 “확정되지 않은 하급심 판결을 갖고 대법원장 책임론까지 거론하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며 “대법원장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대법원은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 등이 “이 대법원장이 좌편향 판결 사태를 초래했다”고 밝힌 데 대해 강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한 판사는 “ 판결 때문에 법원이 이렇게 공격당하는 경우는 처음 본다”며 “대다수 판사들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데 공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법원장은 일단 포문을 열어둔 채로 대응 방안을 고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대법원장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측근들로부터 조언을 듣고 있다고 한다. 한 대법원 관계자는 “주변에서 ‘섣불리 입장을 밝힐 경우 사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다”고 전했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 15일 “일련의 비판적인 성명이나 언론 보도가 그 한계를 넘어 사법권의 독립을 훼손할 수 있음을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이 대법원장의 그간 발언들에 비춰볼 때 ‘사법부 독립’만 강조하는 자세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그는 취임 후 “재판은 국민의 이름으로 하는 것” “재판다운 재판을 해야 한다”며 법원의 반성을 촉구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법원 판결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에 개의치 말라”고 하는 등 사법부 개혁보다 독립 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권석천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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