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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걸으면서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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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0대에 내 꿈은 걸어서 동해안을 종단해 보는 것이었다. 별을 보며 모래밭에서 야영하고 싶었다. 생각만 해도 바닷바람이 비릿하게 얼굴 위로 끼쳐오곤 했다. 그러나 꿈은 무위로 끝났다. 통금.방종.순결 같은 단어들이 내 희망을 막았다. 30대에도 나는 7번 국도를 내 발로 걷지 못했다. 차 안에 앉아 기껏 창문이나 열어놓고 "아, 아, 바다!"라고 입으로만 중얼거렸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초조해진 건 마흔이 넘어서다. 원하는 것을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싶어졌다.

생전의 어머니는 영주 부석사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했다. 부석사는 바로 코앞이었다. 맘만 먹으면 두어 시간이면 닿을 거리였다. "거길 못 가보면 저승사자가 들여보내 주지를 않는단다." 그만큼 풍광이 빼어난 곳이란 속설이었을 텐데 결국 나는 엄마를 모시고 부석사에 가지 못했다. 날이 너무 추웠고, 차편이 마땅찮았고, 몸에 열이 났고, 시간이 모자랐다. 그 이유들의 가당찮음이여! '원하는 건 지금 당장! '이란 문구를 엄마 돌아가신 뒤 나는 냉장고에 딱 붙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게서 점점 열망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원하는 게 뭔지 모호해졌다. 통금.방종.순결 모두 해당사항이 없어졌는데 나는 여전히 동해행을 망설이기만 했다. 나는 어느새 걷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 내 무릎은 10분만 걸어도 끼익거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이래서 7번 국도를 무슨 수로? 그따위 것 해봤자 무슨 소용인데? 자꾸 비웃고 도망치고 주저앉았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실크로드 횡단기가 내 눈에 들어온 건 최근이다. 그는 은퇴 후인 예순두 살에 이스탄불을 떠나 4년 뒤에 시안(西安)에 닿았다. 순전히 제 발로 1만2000㎞의 실크로드를 걸었다. 마르코 폴로가 말을 타고 지나갔던 동서양을 잇는 그 길에 60대의 올리비에는 '바닷속에 병을 던지듯' 제 몸을 던졌다. 온몸에 모래바람을 맞으며 해돋이와 해넘이 속으로 혼자 걸어 들어가는 그를 나는 눈부시게 바라봤다. 찬란하고 장엄했다. 똑같은 무릎관절에 똑같은 심장에 똑같은 두 눈인데 그까짓 포항에서 속초까지를?

쉰이 되기 전에 나는 동해안을 내 발로 걸을 것이다. 별을 보며 모래밭에서 잠들 것이다. 다릿심을 기르기 위해 나는 우선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한비야는 줄넘기라지만 나는 무조건 걷기를 택했다. 걷기만큼 간단한 일은 없다. 한쪽 다리를 들어 공중으로 올린다. 뒤에서 앞으로 민다. 땅을 디디던 다른 쪽 다리를 다시 공중으로! 리듬에 맞춰 북을 치듯 천천히! 산에도 올라갔다. 아침마다 거기 서 있는 연필크기의 사람을 향해 질투와 선망을 보내던 바로 그 자리에 나도 섰다. 그새 걷는 게 좋아졌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도 무언가 머릿속에 연방 스쳐 지나간다. 내 뇌세포는 방심과 집중의 딱 중간, 노동과 무위의 딱 중간 쯤에서 그렇게 달콤해 한다는 것도 알았다. 올 가을 나는 먼저 어머니가 태어난 서후면 개실에서 아버지가 태어난 임하면 벽계까지 걸어갈 생각이다. 다행히 30여㎞밖에 안 되는 거리다.

재수하는 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어느 날 30년 전 내가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을 듣고 들어왔다. "'난 청순가련형이 좋아' 했더니 그 애가 '넌 청순은 한데 가련은 아니야' 하잖아요." 막 웃다가 깨달았다. 한 세대가 터무니없이 짧구나! 부석사에 못 가본 어머니를 대신해 나는 부석사에 스무 번도 더 갔다. 내 딸은 나중에 제 발로 타클라마칸을 넘어 이스탄불까지 걸어갈는지도 모른다. 삶은 반복되지만 동시에 전진하는 것이라고 나는 걸으면서 생각한다.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