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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신인문학상] 시 부문 심사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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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3면

'복숭아' (서광일)는 일견 평범하기 짝이 없는 시적 진술로 시작된다.

사내가 자전거를 세우고 길바닥에 흩어진 복숭아들을 줍는 1연부터가 그러한데 특히 비닐봉지에서 흩어져 나온 복숭아들을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오는 여고생들" 에 비유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평범의 시행들은 2연의 시적 비약을 감추기 위한 의도적인 온축으로 보인다.

2연에 의하면 사내는 한쪽 다리가 짧으며 그래서 자전거 페달을 비스듬히 밟을 수밖에 없으며 퇴근길에 가게에 들러 식구들을 위해 "털이 보송보송한" 복숭아를 고를 줄 아는, 작지만 눈밝은 기쁜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시인의 시선은 사내가 "허리를 굽혀 복숭아를 주울 때마다/울상이던 바지주름이 잠깐 펴지기도" 하는 데까지 머물면서 이 가난한 날의 삽화를 돌연 활력있는 어떤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런 시대에도 시를 쓰고 읽는 이유일 것이다.

즉 '복숭아' 는 시의 기본 규칙을 잘 준수하면서 어떤 가난에 특별하고 의미 있는 삶의 충만을 선사했다.

그리하여 비록 순간에 불과하겠지만 어느 스산함 속에서도 자전거 바퀴는 기쁨으로 탱탱할 수 있는 것이다.

'초원에 누운 사내' (김성규)역시 '복숭아' 처럼 현실의 삶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선자들의 호감을 샀으나 지나치게 산문적이라는 것이 흠이었다.

시 후반부의 "깨알 같은 글씨들이 싹을 틔운다" 이후는 과감히 생략해도 좋았을 것인데 자기의 시적 의도를 일일이 설명하고 이해받으려 하는 나머지 끝내 산문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일기 쓰는 행위를 고추 모종 심는 것으로 환치하는 시적 재기가 돋보였다.

같이 묶어 보낸 '사막에 차려진 밥상' 도 의도가 시를 압사해버린 예다.

그러나 '미운 오리새끼' '구름에 쫓기는 트럭' 등 다른 작품들이 모두 나름대로 안정되어 있고 이번 응모자들 중 시를 만드는 솜씨가 가장 뛰어났으나 앞에 거론한 개개 작품의 완성도가 '복숭아' 를 앞지르지는 못해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복숭아' 를 중앙신인문학상 영예의 당선작으로 밀면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 중에서 '성에' 는 짧고 빛났으나 '소음동 삽화' 같은 시들은 너무 시적 규범에 얽매인 나머지 안이한 감동만을 선사하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밝혀둔다.

예술가에게 있어 그 앞의 선행 규범이란 때로 과감히 깨뜨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점도 이해했으면 한다.

당선권에 육박하지는 못했으나 이성옥의 '개마고원 만세' , 예서화의 '시험' '겨울밤' , 정아담의 '1999년 7월 29일 기니의 두 소년' '이필순씨와 그의 손녀' , 이종욱의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들' '호시절(好時節)' , 문경희의 '운학산 포도' , 그리고 김남극과 진태숙의 시들도 수많은 경쟁작을 뚫고 올라온 개성있는 작품들이었음을 밝힌다.

당선작과 이들 작품의 수준차는 그리 크지 않다.

다만 당선작인 '복숭아' 에 들어 있는 어떤 시의 눈(眼), 작품 전체에 돌연 생기를 불어넣는 그 무엇이 이들 작품에는 부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대저 예술이란 무엇인가. 죽은 사물에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숨결을 부여하는 행위 아닌가. 더욱 분발하시기 바란다.

<심사위원 : 황동규.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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