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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프런트] ‘워낭소리’ 봉화군 산골 웃음소리 사라지고 집집마다 떠는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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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해 12월 10일 경북 봉화군 상운면의 한 마을. 전 상운농협 조합장 우모(62)씨가 조합원 강모(71·여)씨 집에 들어섰다. 마침 강씨는 집을 비웠다. 인기척이 없자 마루 장판 밑에 5만원권 지폐 한 장을 넣고 집을 나왔다. 그는 이날 오후 강씨에게 전화를 걸어 “마루 장판 밑에 돈을 넣어 두었으니 확인해 보라”고 알려 주었다.

직전에 조합장을 한 우씨는 1월 11일 열릴 상운농협 조합장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었다. 우씨는 대부분 특정 장소에 돈을 놓고 전화로 알려 찾게 했다. 직접 전달하면 거절할 우려가 있어서였다. 그는 ▶집 안 신발장의 신발 속 ▶자동차의 햇빛 가리개 속 ▶대문에 붙은 우편함 안 ▶마루에 있는 전화번호부 속 등에 현금이나 현금이 든 봉투를 넣었다.

우씨는 전체 조합원(1067명)의 절반이 넘는 541명에게 5만∼50만원씩 모두 7200여만원을 뿌렸다. 선거운동원은 전혀 동원하지 않았다. 조직을 동원하면 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을 우려해서였다. 경찰 관계자는 “조합원들은 놓고 간 돈을 모두 챙겼다” 고 말했다. 우씨는 선거 7개월여 전부터 돈을 전달하는 식으로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매일 돈을 준 뒤 이름과 금액·날짜를 꼬박꼬박 기록했다. 현금은 미리 준비했다. 선거에 대비해 계좌를 통하지 않고 현금을 모아 왔다는 것이다.

우씨의 금품 살포 행각은 지난해 12월 꼬리가 잡혔다. 입소문을 통해 이런 사실을 들은 경찰이 우씨를 미행하던 중 지난해 12월 28일 현장을 확인한 것이다. 다음 날 경찰은 우씨 차량의 압수수색 과정에서 장부도 발견했다. 결국 우씨는 지난 5일 농업협동조합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추수호 봉화경찰서장은 “향응이 아니라 돈을 받았기 때문에 ‘50배 과태료’ 처분과는 관련이 없다”며 “부정선거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돈을 받은 주민 전원을 사법 처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봉화군 상운면은 지난해 3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워낭소리’의 촬영 무대다. 영화에서처럼 주민 대부분은 논 농사와 고추·사과를 재배하는 순박한 산골 사람들이다. 평화롭기만 했던 상운면은 올 들어 금품 수사가 시작되면서 전 주민이 불안과 긴장에 휩싸여 있다. 수사 대상은 전체 면민(1976명) 네 명 중 한 명꼴이다.

자신도 돈을 받았다는 한 이장은 “조합원 가운데는 90세 가까운 암 환자도 있는데 혹한에 경찰의 출두요구서를 받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요즘 들어 부들부들 떠는 주민들도 있다”고 말했다.

11일엔 조합장 선거가 실시됐다. 우씨는 출마하지도 못했다. 면사무소 등의 설득으로 투표율은 87.6%를 기록했다. 경찰 등은 청도군수 부정선거 사건 때처럼 자살 같은 돌발변수가 생길 것을 우려하고 있다. 상운면 김용덕 면장은 “3년 전에 이어 봉화에서 두 번째로 이런 일이 생겨 너무 속상하다”며 “잘못이 있으면 벌을 받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주민들에게 호소한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돈을 받은 주민들은 돈 액수만큼 추징금을 내고 100만원에서 200만원 사이의 벌금형에 처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송의호·홍권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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