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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칼럼] 한국전쟁 60돌과 한국사회 <하> 전쟁 공포증의 덫을 벗으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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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 링컨 대통령 동상이 처음 세워진 게 2003년이다. 연방통합의 정신을 기린다는 의도였지만, 도시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리치몬드는 남북전쟁 때 링컨의 북부연합에 반기를 든 남부의 심장부였던 탓이다. “빈 라덴 동상을 9·11 현장에 세우려는 짓”이라는 살벌한 비유까지 등장했다. 『살아 숨쉬는 미국역사』(박보균 지음)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인데, 많은 걸 시사해준다. 그만큼 내전의 후유증은 몇 세대를 간다는 얘기다. 올해로 60년을 맞는 한국전쟁도 구조는 ‘내전+국제전’이다.

감정의 앙금은 그 때문이지만, 묘하게도 한국사회는 그런 통념과 따로 논다. 일단 북한은 여전히 앙앙불락이다. 걸핏하면 “미제” “남조선 괴뢰”를 운운하는 그들은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국가’다. 선제공격(남침) 실패 뒤 평양이 잿더미로 변하는 걸 보면서 상대에 대한 두려움·적개심으로 똘똘 뭉쳤다. 그게 집단 피해망상증으로 발전해 끝내 병든 체제로 쪼그라들었다. 저들의 선택이 얼마나 희한한 것인지는 통일 이후 베트남의 상황과 비교해도 금세 드러난다. 북한과 달리 우리는 기적적인 경제발전 이후 너그러워졌다.

우리는 열린 사회로 바뀌었다지만, 문제는 너무 많이 너그러워졌다. 1970년대 관(官)주도의 반공교육이 지긋지긋하고 억압적이었다는 이유로 갑옷을 냉큼 벗어 던진 것이다. 정치의 요체이자 사회 존립의 뼈대인 국가안보조차 독재시대의 구호로 치부된다. 정치권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건 사회다원화에 따른 다양한 가치가 아니라 어리석은 무장해제에 불과하지만, 사회 에너지는 왼쪽으로, 왼쪽으로만 쏠렸다. 그 결과 비판적 자유주의 내지 진보만이 상식·표준인양 행세하는 세상이 됐다. 유감스럽게도 그게 학문영역까지 스며들었다.

좌편향 역사교과서, 친일파 인명사전 소동이 ‘정의의 이름으로’ 거듭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대사의 분수령 한국전쟁 자체를 삐뚜름하게 보거나, 전쟁영웅 백선엽을 친일파로 규정하는 허튼 시도도 흔히 본다. 안타깝게도 그걸 교정해줄 사회동력이 부족한 게 엄연한 현실이다. 정부는 사회통합을 이유로 적당한 절충 내지 타협을 시도하려 하지만 여전히 무기력하다. 모두가 한국전쟁에 대한 집단기억, 즉 역사쓰기를 독점한 민중세력이 남긴 폐해다.

즉 현재 한국사회는 남북갈등이 아닌 남남갈등이 문제이고, 이게 자기 발등을 찍는 자해(自害)로 발전하고 있는 셈이다. 어느덧 우리는 ‘문약(文弱)의 사회’로 변했다. 전쟁 포비아(공포증)의 덫에 걸린 것이다. 사병의 군 복무기간도 지난 수십 년 동안 단축 일변도로 흘렀다. 북한이 핵실험을 거푸 해도 한국사회는 거의 대응을 못한다. 이런 황당한 구조에 대한 당당한 비판은 김진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의 한 월간지에 기고했던 글이다. 한국전쟁 60돌에 곰곰 되새겨 봄직한 대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어느덧 두 가지 포비아의 덫에 걸려있다. 우선 경제 제일주의라는 덫이다. 전쟁이 나면 경제와 민생이 타격을 입는다면서 마냥 피해의식부터 키운다. 더 큰 인간적 가치, 사회 안정,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필요하면 전쟁도 하는 것이다. 그걸 외면하는 게 평화의 덫이다. 그저 평화의 레토릭만 자꾸 늘어놓으면 평화가 유지된다는 환상이다.”

조우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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